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733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나는 네게 기차표를 선물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것이 넓고 편안한 길이든 좁고 가파른 길이든 차분하고 담담하게 껴안아 믿음이 가는 친구.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일상에서 벗어나도 좋을 시간이 오면 왕복 기차표 두 장을 사서 한장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또 한 장은 발신인 없는 편지 봉투에 담아 우체통에 넣고는 은밀한 즐거움으로 달력의 날짜를 지워가는 그런 친구. 행선지는 안개짙은 날의 춘천이어도 좋고, 전등빛에도 달빛인줄 속아 톡톡 다문 꽃잎을 터뜨린다는 달맞이꽃이 지천에 널려 있는 청도 운문사이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건 너보다 한걸음 앞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는 것. 그래야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이 불 때마나 지붕에 서 있는 풍향계가 종종걸음치는 시골 간이역,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너를 기다릴 수 있으니까.

 뜬금없이 날아든, 그리고 발신인 없는 기차표에 아마도 넌 고개를 갸웃하겠지. 그리곤 기차여행에 맞추기 위해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의 일을 서둘러 끝내고 나서 청바지에 배낭 하나 달랑 메로 기차를 타리라. 또한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기차의 율동에 몸을 맡긴 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비도시적인 풍경을 보며 바쁜 일상에 함몰되어 지낸 그 동안의 네 생활과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차표 한장에 실어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생각하리라.

 예정된 시간에 기차는 시골 간이역에 널 내려놓을 것이고, 넌 아마도 낯선 지역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과 기분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개찰구를 빠져 나오겠지. 그런 후 너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네가..!?' 하는 말과 함께 함빡 상큼한 웃음을 지을 것이다. 미지의 땅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 발견한 안도감과 일박이일의 여행, 그 신선한 자유를 선물한 사람을 찾아낸 즐거움으로 말이다. 늘 곁에 있지만 바라보는 여유 없어 '잊혀진 품'이 되어 버린 자연속 에서 우리는 또한번 여장을 꾸려 '함께 그러나 따로이'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도시를 떠난 건 바로 이 여행을 시작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리고 일박이일의 여정을 끝냈을 때 우리는 각자의 내면으로 향한 고독한 여행으로부터 무사히 돌아왔음을 축하하며 우리 일상이 속한 도시를 향해 가는 기차에 '함께' 오를 것이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 자기 몫의 삶을 담담히 살아낼 것이다.

 친구야, 너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선물한 차표가 결코 일박이일의 여정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네게 특히 힘들고 고단할때 보내질 선물이라는 것을. 내가 너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 서미애(방송작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7720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6804
2526 '오늘 컨디션 최고야!' 風文 2014.12.28 7747
2525 「"에라이..."」(시인 장무령) 바람의종 2009.07.06 7738
2524 아름다움과 자연 - 도종환 (74) 바람의종 2008.09.26 7736
2523 친구(親舊) 바람의종 2012.06.12 7734
» 나는 네게 기차표를 선물하고 싶다 바람의종 2008.02.13 7733
2521 눈 - 도종환 (112) 바람의종 2008.12.27 7732
2520 흙장난 바람의종 2012.06.20 7731
2519 마음이 상하셨나요? 風文 2014.12.08 7729
2518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싶은 것 두 가지 風文 2015.06.24 7728
2517 오늘 하루 - 도종환 (62) 바람의종 2008.08.27 7725
2516 '열심히 뛴 당신, 잠깐 멈춰도 괜찮아요' 바람의종 2013.01.15 7723
2515 '공손한 침묵' 風文 2014.12.28 7715
2514 호기심으로 가득찬 아이처럼 바람의종 2012.04.27 7711
2513 '당신을 존경합니다!' 바람의종 2013.01.10 7711
2512 각각의 음이 모여 바람의종 2008.10.07 7708
2511 찾습니다 바람의종 2013.01.28 7705
2510 '참 좋은 당신' 風文 2014.12.11 7699
2509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風文 2015.02.17 7698
2508 하늘, 바람, 햇살 바람의종 2013.01.31 7696
2507 작은 것에서부터 바람의종 2012.07.30 7694
2506 흐린 하늘 흐린 세상 - 도종환 (131) 바람의종 2009.02.17 7690
2505 가슴으로 답하라 윤안젤로 2013.05.13 7689
2504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윤안젤로 2013.03.23 7688
2503 사람은 '일회용'이 아니다 바람의종 2012.06.19 768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