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9475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우리처럼 인터넷에 목매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필요한 정보를 찾을 때를 빼면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하루의 상당 시간을 인터넷에 들어가 산다. 메신저로 타인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다른 이의 블로그, 기관이나 단체 홈페이지로 마실 다니기를 즐긴다. 서구의 인터넷 이용이 '정보적'이라면,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이렇게 '친교적'이다.

소통에서 친교성이 중시되고, 논쟁에 감정이 실리는 것은 구술문화의 특징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90%. 그때만 해도 인구 대부분이 구술문화에 속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맹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서구에서 몇 백 년이 걸린 과정을 우리는 몇 십 년 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구술문화의 특성을 완전히 지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 우리 의식에 아직 구술적 특성이 강하게 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구술문화의 특징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그 인격이 개성적이기보다 집단적이며, 혹은 그 의식이 반성적이기보다 의타적이다. 어떠한 사물을 ‘정의’하려는 시도도, 삼단논법의 형식 논리도 구술문화에서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 악플이 난무한 현상은 논증과 증거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사법체계 이전, 즉 그 옛날 촌락공동체에서 행해지던 멍석말이의 디지털 버전이다. 구술문화의 사유와 정서를 가진 우리들에게 인터넷은 적어도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잃어버린 촌락공동체를 다시 돌려주었다.


우리의 인터넷 글쓰기를 보면 논리나 추론은 없고 찬양이나 비난만 있다. 차가운 비판은 없고, 넘치는 것이 뜨거운 욕설이다. 자신의 인격을 책임진 개인은 사라지고, ID 뒤에 숨은 익명의 집단들이 떼를 이뤄 사냥감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공격 대상을 발견하면, 디지털 멍석말이에 들어가 마음껏 원시적 감정을 분출한다. 우리의 인터넷에서 너무나 자주 보는 이런 현상은 분명히 문자문화 이전의 습성,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를 맞아 이 정신적 낙후성이 외려 기술적 선진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인터넷 자체가 새로운 구술성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글쓰기는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글로 타이핑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묘하게 뒤섞인다. 우리가 그토록 인터넷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전히 강한 구술성이 남은 우리의 의식이 거기에 적합한 첨단매체를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4992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3878
3002 속상한 날 먹는 메뉴 風文 2024.02.17 157
3001 지금의 나이가 좋다 風文 2024.02.17 157
3000 AI 챗지피티ChatGPT가 갖지 못한 것 風文 2024.02.08 248
2999 어머니의 기도와 노동 風文 2024.02.08 228
2998 잘 웃고 잘 운다 風文 2024.02.08 207
2997 '의미심장', 의미가 심장에 박힌다 風文 2024.02.08 272
2996 마음의 소리 風文 2024.01.16 651
2995 제자리 맴돌기 風文 2024.01.16 284
2994 침묵과 용서 風文 2024.01.16 793
2993 귓속말 風文 2024.01.09 267
2992 순한 사람이 좋아요 風文 2024.01.09 268
2991 백합의 꽃말 風文 2024.01.06 249
2990 수수께끼도 풀린다 風文 2024.01.04 240
2989 '내가 김복순이여?' 風文 2024.01.03 280
2988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風文 2024.01.02 323
2987 다시 태어나는 날 風文 2024.01.02 279
2986 친밀한 사이 風文 2023.12.29 271
2985 손바닥으로 해 가리기 風文 2023.12.28 304
2984 역사의 신(神) 風文 2023.12.28 630
2983 아기 예수의 구유 風文 2023.12.28 272
2982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가라 風文 2023.12.20 304
2981 헌 책이 주는 선물 風文 2023.12.20 350
2980 샹젤리제 왕국 風文 2023.12.20 284
2979 입을 다물라 風文 2023.12.18 390
2978 산골의 칼바람 風文 2023.12.18 25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