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9.2. 큐벨레, 아티스

by 風文 posted Nov 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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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9장 도래종교

  2. 큐벨레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키벨레 상]


  큐벨레(Cybele)는 동방의 여신이며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이라고 한다.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메노스라는 리디아의 왕자와 딘듀메네의 딸이라고도 한다. 그리스 신화의 레아와도 동일시된다. 태어나자마자 산에 버려졌는데 산짐승의 젖으로 살아났고 그 산 이름을 따서 큐벨레로 불리게 되었다. 커서 아버지 궁전으로 돌아와 미모의 청년 아티스와 밀통하게 되자 아버지는 청년을 불구자로 만들어 버렸다. 여신의 아티스에 대한 사랑은 프리지아에서의 큐벨레 숭배에 잘 나타난다. 즉 큐벨레는 아티스에게 종신토록 자신을 섬기며 독신을 지킬 것과 이를 어길 경우 속죄를 요구하였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티스는 거세되고 소나무 십자가에 처형되어 지상의 죄를 속죄하게 된다. 프리지아에서 큐벨레 축제는 극도로 장엄하게 치러지는데, 그 사제들은 코류반테스 혹은 칼리스로 불리며 미리 신체의 일부를 제거한 선택된 자가 아니면 참여하지 못하였다. 의식은 아티스를 잃은 큐벨레의 슬픔을 표현하는 행사로, 마치 실성한 자의 모임처럼 무시무시하고 예리한 음과 절규, 드럼과 작은 장고소리, 방패와 창 부딪치는 소리가 모두 같이 섞여서 온천지를 진동하였다. 또한 새로 참가하는 자에게 수소를 잡아 그 피로 세례를 주었다(타우로볼리즘).

  큐벨레는 건강한 여성을 상징하고 그녀의 임신은 땅의 생식을, 여러 개의 유방은 지상에서 모든 산짐승에 식량을 주는 것을 상징한다. 탑 장식관이나 면사포를 쓰고, 곁에는 두 마리의 사자를 대동한 채 옥좌에 앉아 있거나 사자가 끄는 일륜마차를 타고 있을 때도 있다. 아티스는 잔을 들고 그 옆에 배석하였다. 두 마리 암수 사자는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두 남녀가 신전을 혼인의 신방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독죄로 변신시킨 것이다. 큐벨레 숭배는 그리스에 들어가 엘레우시스의 비의로 절충되어 데메테르 엘레우시스 비의로 자리잡았다. 로마인들도 이들 정중히 받아들여 로마의 최고 모신으로 모시고 바티칸에 신전을 세웠는데 그리스도교가 점거하는 서기 4세기까지 엄존하였다. 로마에서는 시뷸레의 신탁에 따라 프리지아의 페시노스에서 여신상을 모셔와 축제를 벌였는데 그 배가 티베르 강가로 다가오면 클라우디아의 미덕과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허리띠를 끄르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여신 숭배의 핵심이 되는 성석을 실은 배가 티베르 강에서 좌초하였을 때 귀부인 클라우디아가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그 배를 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 무속신앙은 매우 강하여 매년 4월 6일에는 여신의 성체를 알몬 강물에 목욕을 시켰다. 축제 때는 음란한 외설이 만발하고 사제들은 외설발언에 열을 올렸는데 이는 음탕하고 부도덕한 행위에서 벗어남을 나타내었다.


  아티스
  아티스(Attis, Atys)는 프리지아 신화에서 큐벨레 숭배와 동방하여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로, 기원전 204년에는 로마로 들어왔다. 원래 양치기이지만 뛰어난 미모로 큐벨레의 사랑을 받았다. 이 젊은이에 매료당한 큐벨레는 자신의 사원을 맡기며, 평생 동정을 지켜 독신으로 살 것을 약속케 하였다. 그러나 아티스는 한 요정에게 연정을 품어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여신의 극심한 역정을 사서 실성하게 되고, 마침내 예리한 돌로 스스로 거세하여 성불구가 되었다. 그 후 큐벨레 숭배를 맡은 승려들은 종신토록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자진해서 거세하였다. 큐벨레와 아티스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큐벨레와 아티스가 사랑에 빠지자 큐벨레의 아비가 젊은이를 성불구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한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티스는 강의 신 상가리오스의 달 나나의 아들로, 나나가 편도 가지를 품었다가 잉태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예기인즉 아그디스티스라는 신은 양성을 지닌 괴물이었는데 신들이 그의 남성성기를 제거하여 땅에 던지자 거기에서 편도나무가 솟아났다. 상가리오스의 딸 하나가 그 가지를 모아 가슴에 품었더니 잉태가 되었고 거기에서 아티스가 태어났다. 아티스는 태어나자마자 산에 버려져 산양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산간에서 남성성기를 제거당하여 여성이 된 아그디스티스 (큐벨레)가 아티스의 미모에 넋이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티스가 페시노스 왕의 딸과 축복된 혼례를 올리게 되자 질투에 휩싸인 아그디스티스는 마법의 능력을 발휘하여 왕과 사위 간에 싸움을 붙이니 격분한 나머지 둘다 성불구가 되었다. 큐벨레는 자해하려는 아티스를 소나무로 바꾸었고 그 후 소나무는 모든 신의 모신에게 바치는 나무가 되었다.
  또한 아티스는 큐벨레의 화신인 처녀신 나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티스는 성인이 되자 어느 해 속죄 제삿날에 희생되어 인류 구제를 위하여 거세하고 소나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데 아티스의 성혈이 흘러 지상의 죄를 모두 속죄하였다고도 한다. 이 날이 바로 춘분으로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한다. 아티스의 육신은 빵에 넣어져 숭배자들에게 먹은 바 되고, 아티스는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 부활의 날을 카니발 또는 힐라리스라 부르는데 사람들은 부활의 환희에 들떠 거리에서 변장을 한 채 춤추고 돌아다니며 한때의 정사에 빠졌다. 이 날이 일요일이다. 그리스도교도들도 아티스의 부활에서 유래한 부활제를 경축하고 카니발 행사를 겸하였는데 이는 후세에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축제주일의 최종일은 행사의 절정에 달하며 그 날 즉 4월 1일을 만우절이라 하였다.
  아티스 숭배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아티스 수난에 대해서는 3월 25일에 추모를 하였는데 그것은 아티스가 탄생한 동짓날인 12월 25일에서 꼭 9개월째 되는 날이다. 수난의 시각은 또한 그가 잉태된 시각도 된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자신들의 구세주의 잉태와 탄생일이 아티스의 그 날과 같은 날이라 하고, 이것이 논쟁거리로 떠오르자 즐겨하는 지론으로 그리스도교가 생기기전에 악마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본 떠 이교의 비의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아티스 신봉자는 결국 아티스의 희생의 날을 그리스도교도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483~565)는 3월 25일을 예수 잉태의 날로 고지하고 축일로 공포하였다. 따라서 예수도 아티스와 마찬가지로 9개월 후인 동짓날에 태어난 것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