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918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광진이 형」(시인 김두안)   2009년 7월 2일_마흔일곱번째





 





대나무 울타리가 보입니다. 댓돌 위에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놓여 있습니다. 작고 고요한 집은 커다란 귓바퀴 같아서 팔꿈치를 벌떡 세우고 금방 일어설 것 같습니다. 그가 서울 맹인학교에서 안마와 점자를 배워 돌아오고 마당에는 애달픈 라디오 소리만 쌓여 갑니다. 그는 오늘도 막배 올 시간에 어김없이 부두로 나갑니다. 가파른 골목을 가만가만 두드리는 소리 들립니다. 귀밝은 지팡이가 먼저 골목을 꺾어 돌아가고 싱글벙글 그림자 뒤따라갑니다. 허연 눈동자를 몇 번 해에 비춰보고 분명 뭔가 보았다는 듯 서둘러 지팡이를 재촉합니다. 대숲이 흔들리고 골목 똥개들 컹컹 짖습니다. 소문난 기와집 목련나무 가지 담장 너머로 찬밥 한 공기 건네줍니다. 마을 어귀 그물 꿰매는 아낙네들 술잔에 흥겨워 그를 불러 세웁니다.


 


어이 총각! 거시기에 털났으까 잉-


혹시 또 알아,


올봄에 눈먼 처녀라도 하나 섬에 떠밀려올지


아따 이 사람들아-


둘 다 눈멀먼 안 돼제,


홀딱 벗고 자다 날샌지도 모르먼 쓰것는가


화끈거리는 농담 소리


시궁창 민들레꽃을 훌쩍 뛰어 넘어갑니다.


 


부두를 배회하는 갈매기 소리 들립니다. 그가 슈퍼 간판 밑에 걸터앉아 싱글벙글 웃습니다. 발뒤꿈치를 구르며 눈먼 눈으로 바다를 쳐다봅니다. 하얀 천신호가 죽섬을 희미하게 돌아옵니다. 두근거리는 뱃소리 점점 가깝게 들립니다. 썰물 거슬러와 가슴을 쿵 부딪칩니다. 한바탕 부두가 술렁거립니다. 젖은 발소리들 철썩철썩 마을을 향해 사라집니다. 그는 발소리가 지나칠 때마다 텅 빈 소라 껍데기처럼 귀를 기울입니다. 이 발소리도 아니라고, 세차게 얼굴을 털어냅니다. 노을을 첨벙첨벙 건너가는 발소리. 그의 얼굴에 쓸쓸한 파문이 번집니다. 누굴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턱을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가슴께에 웃음을 파묻습니다. 부두를 가만히 밀어내며 막배가 떠나갑니다. 뱃고동 소리 섬 깊숙이 파고듭니다. 거품길이 지워지고 이제 부두에는 긴 그림자 하나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까마득히 멀어지는 발소리 컴컴하게 더듬고 있습니다. 지팡이로 힘껏 부두를 몇 번 두들겨 볼 뿐 그는 서울에서 만났던 그 지팡이 소리 기다린 적 없습니다.

















■ 필자 소개


 




김두안(시인)


1965년 전남 신안군 임자도 출생. 임자중, 목포 영흥고 졸업. 2006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3185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553
2585 '인기 있는' 암컷 빈대 바람의종 2012.07.02 8081
2584 천성과 재능 바람의종 2012.05.11 8071
2583 '산길의 마법' 윤안젤로 2013.04.11 8071
2582 정신적 우아함 바람의종 2013.01.23 8066
2581 명함 한 장 風文 2014.12.25 8065
2580 예술이야! 風文 2014.12.25 8058
2579 신뢰는 신뢰를 낳는다 바람의종 2013.01.02 8054
2578 '충공'과 '개콘' 바람의종 2013.01.11 8040
2577 예행연습 바람의종 2012.06.22 8020
2576 「스페인 유모어」(시인 민용태) 바람의종 2009.06.09 8006
2575 뒷목에서 빛이 난다 바람의종 2012.11.05 8006
2574 좋은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8000
2573 엄마의 주름 風文 2014.08.11 7995
2572 '높은 곳'의 땅 바람의종 2012.10.04 7994
2571 구경꾼 風文 2014.12.04 7993
2570 '욱'하는 성질 바람의종 2012.09.11 7992
2569 혼자라고 느낄 때 바람의종 2008.10.29 7988
2568 「1997년도라는 해」(시인 김영남) 바람의종 2009.07.29 7987
2567 굿바이 슬픔 바람의종 2008.12.18 7986
2566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도 있다 바람의종 2012.09.04 7982
2565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風文 2015.07.05 7976
2564 촛불의 의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9 7975
2563 12월의 엽서 바람의종 2012.12.03 7969
2562 유쾌한 활동 風文 2014.12.20 7969
2561 등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2 795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