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8138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정재학


손택수ㆍ시인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렁한 살 껍데기가 걸려 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톱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누군가 나의 성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펄떡거리는 심장을 도려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담벼락의 비가 마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전기불에 비하면 촛불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전기불은 방 안의 어둠을 단번에 밀어내버리지만, 촛불은 어둠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성격이 어둠을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완전히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어둠과 빛이 동시에 공존하는 그 품은 부드럽고 안온하다.

어머니는 그 부드러운 불로 밥을 짓고 있다. 촛불로 밥을 짓는 게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한가라고 묻지는 말 일이다. 거리에선 지금 누군가 십자가에 매달리듯 피뢰침에 매달려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고, 입을 틀어막기 위해 칼이 목에 꽂혀 있는 끔찍한 지옥도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이 끔찍한 현실을 드러내는 게 촛불이다. 비 속에서도 촛불은 타오르고, 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촛불은 타오른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우리 시대에 다시 본다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4157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3544
2585 소인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4 8113
2584 '산길의 마법' 윤안젤로 2013.04.11 8113
2583 '인기 있는' 암컷 빈대 바람의종 2012.07.02 8103
2582 천성과 재능 바람의종 2012.05.11 8091
2581 정신적 우아함 바람의종 2013.01.23 8077
2580 예술이야! 風文 2014.12.25 8071
2579 신뢰는 신뢰를 낳는다 바람의종 2013.01.02 8067
2578 '충공'과 '개콘' 바람의종 2013.01.11 8062
2577 좋은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8039
2576 「스페인 유모어」(시인 민용태) 바람의종 2009.06.09 8036
2575 굿바이 슬픔 바람의종 2008.12.18 8029
2574 예행연습 바람의종 2012.06.22 8023
2573 '높은 곳'의 땅 바람의종 2012.10.04 8013
2572 '욱'하는 성질 바람의종 2012.09.11 8011
2571 구경꾼 風文 2014.12.04 8011
2570 뒷목에서 빛이 난다 바람의종 2012.11.05 8009
2569 혼자라고 느낄 때 바람의종 2008.10.29 8007
2568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도 있다 바람의종 2012.09.04 8007
2567 촛불의 의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9 8002
2566 엄마의 주름 風文 2014.08.11 7999
2565 12월의 엽서 바람의종 2012.12.03 7995
2564 「1997년도라는 해」(시인 김영남) 바람의종 2009.07.29 7992
2563 할매의 봄날 風文 2015.04.27 7983
2562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風文 2015.07.05 7982
2561 유쾌한 활동 風文 2014.12.20 798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