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550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겨우내 언 나뭇가지에 내려와 온종일 그 나무의 살갗을 쓰다듬으면서도 봄 햇살은 말이 없습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나무 둥치에 내려 나무의 살 속으로 들어가려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자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와 기어코 단단한 각질 아래로 스며들어가면서도 봄비는 조용합니다. 나무의 속을 적시고 새순을 키워 껍질 밖으로 밀어내면서도 봄비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않습니다.

웅크린 몸을 좀처럼 펴지 못하고 있는 꽃봉오리를 입김으로 조금씩 열어 내면서도 봄바람은 쇳소리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눈을 감고 있는 봉오리마다 찾아가 감싸고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꽃이 되게 하는 봄 햇살, 봄비, 봄바람은 늘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혼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바람이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햇살이 몸을 데워 주며 빗방울이 실핏줄을 깨워 주고 흙이 흔들리는 몸을 붙잡아 주어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 속에는 그래서 자연의 온갖 숨결이 다 모여 있고 우주의 수 없는 손길이 다 내려와 있습니다. 그걸 꽃이 제일 먼저 알기 때문에 조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모든 꽃이 다소곳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를 꽃으로 있게 해 준 자연의 품으로, 우주의 구극(究極) 속으로 말없이 돌아갈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꽃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할 뿐입니다. 살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고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꽃 한 송이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오랜 세월 그 꽃과 함께 존재하고 일하고 움직이면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입니다. 억겁의 인연이 그 속에 함께 모여 꽃과 함께 나고 살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1.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Date2023.02.04 By風文 Views4006
    read more
  2. 친구야 너는 아니

    Date2015.08.20 By風文 Views92933
    read more
  3. 아침의 기적

    Date2009.03.01 By바람의종 Views5184
    Read More
  4. 저녁의 황사 - 도종환 (134)

    Date2009.03.01 By바람의종 Views10591
    Read More
  5. 새 - 도종환 (135)

    Date2009.03.01 By바람의종 Views6075
    Read More
  6.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 도종환 (136)

    Date2009.03.01 By바람의종 Views6696
    Read More
  7. 욕 - 도종환 (137)

    Date2009.03.03 By바람의종 Views6155
    Read More
  8. 꿈의 징검다리

    Date2009.03.03 By바람의종 Views5139
    Read More
  9. 라일락 향기

    Date2009.03.03 By바람의종 Views6710
    Read More
  10. 봄은 먼데서 옵니다. - 도종환 (138)

    Date2009.03.08 By바람의종 Views7331
    Read More
  11. 봄은 낮은 데서 옵니다. - 도종환 (139)

    Date2009.03.08 By바람의종 Views5469
    Read More
  12.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 도종환 (140)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6550
    Read More
  13. 봄은 차례차례 옵니다 - 도종환 (141)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6239
    Read More
  14. 봄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 도종환 (142)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5051
    Read More
  15. 그래도 사랑하라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5084
    Read More
  16. 통찰력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7217
    Read More
  17. 마음의 평화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4436
    Read More
  18. 비교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4544
    Read More
  19. 없는 돈을 털어서 책을 사라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4386
    Read More
  20. 정신적 지주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6292
    Read More
  21. '사랑한다'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6174
    Read More
  22.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

    Date2009.03.14 By바람의종 Views6962
    Read More
  23. 책이 제일이다

    Date2009.03.16 By바람의종 Views6567
    Read More
  24.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 도종환 (143)

    Date2009.03.16 By바람의종 Views5999
    Read More
  25. 대팻날을 갈아라

    Date2009.03.17 By바람의종 Views3573
    Read More
  26. 그대도 나처럼

    Date2009.03.18 By바람의종 Views5101
    Read More
  27. 민들레 뿌리 - 도종환 (144)

    Date2009.03.18 By바람의종 Views7494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