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306 추천 수 1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3232707&Section=04














봄은 먼데서 옵니다.

남쪽 먼 섬 비탈 밭이나 거기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섰던 매화나무 찬 가지에서부터 옵니다. 바람을 타고 옵니다.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자기만 아는 거인」에 나오는 거인처럼 봄이 오는 정원에 높은 담을 쌓고 지내듯 문을 꼭꼭 걸어 닫고 지내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더미 더미 창문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 방 북쪽 창문도 열고 베란다가 있는 남쪽 이중창도 엽니다. 방안 가득 바람을 불러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답답하던 가슴도 풀리고 숨도 깊게 쉬어집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바람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있고, 저녁 바람에는 저녁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목을 파고 들어오던 거리의 냉기 그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걸레가 얼던 월셋방 담 밑의 긴 골목 어둑어둑 하던 벽에 기대서서 꺼진 연탄불이 다시 붙기를 기다리던 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저녁 바람 속에는 노을 묻은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오지 않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던 날들의 아득한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지친 몸 허기진 육신을 추스르며 혼자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와 머리칼을 날리던 샛강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습니다.

봄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는 봄바람에는 봄바람의 냄새가 스며 있습니다. 초년 교사 시절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 학교, 부임 인사가 끝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무렵 혼자 운동장 끝을 따라 거닐다 만났던 바람의 냄새가 떠오릅니다.

차가운 기운은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따스한 몸으로 바뀌지 않은 봄바람이 앞산 기슭 온갖 나무와 꽃들의 묵은 껍질을 벗기려고 산비알을 따라 올라가다 내려오기를 여러 차례 꽃망울을 완전히 벗기진 못하고 내 곁에 내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낯설음도 곧 익숙해지겠지, 갑자기 바뀐 환경에도 서서히 적응해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바람에 묻어오던 흙냄새 바람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낯익은 냄새에 실려 봄은 옵니다. 개울물이 땅을 녹이며 다시 살아난 벌레들과 물고기 새끼, 도롱뇽알, 개구리의 앳된 비린내를 한데 섞어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도종환 시인



  1. No Image notice by 風文 2023/02/04 by 風文
    Views 3887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2. 친구야 너는 아니

  3.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5162 

    아침의 기적

  4.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10566 

    저녁의 황사 - 도종환 (134)

  5.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6063 

    새 - 도종환 (135)

  6.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6684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 도종환 (136)

  7. No Image 03Mar
    by 바람의종
    2009/03/03 by 바람의종
    Views 6130 

    욕 - 도종환 (137)

  8. No Image 03Mar
    by 바람의종
    2009/03/03 by 바람의종
    Views 5121 

    꿈의 징검다리

  9. No Image 03Mar
    by 바람의종
    2009/03/03 by 바람의종
    Views 6693 

    라일락 향기

  10. No Image 08Mar
    by 바람의종
    2009/03/08 by 바람의종
    Views 7306 

    봄은 먼데서 옵니다. - 도종환 (138)

  11. No Image 08Mar
    by 바람의종
    2009/03/08 by 바람의종
    Views 5428 

    봄은 낮은 데서 옵니다. - 도종환 (139)

  12.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6536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 도종환 (140)

  13.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6217 

    봄은 차례차례 옵니다 - 도종환 (141)

  14.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5032 

    봄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 도종환 (142)

  15.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5060 

    그래도 사랑하라

  16.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7199 

    통찰력

  17.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4412 

    마음의 평화

  18.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4533 

    비교

  19.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4369 

    없는 돈을 털어서 책을 사라

  20.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6284 

    정신적 지주

  21.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6168 

    '사랑한다'

  22.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6958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

  23. No Image 16Mar
    by 바람의종
    2009/03/16 by 바람의종
    Views 6566 

    책이 제일이다

  24. No Image 16Mar
    by 바람의종
    2009/03/16 by 바람의종
    Views 5985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 도종환 (143)

  25. No Image 17Mar
    by 바람의종
    2009/03/17 by 바람의종
    Views 3571 

    대팻날을 갈아라

  26. No Image 18Mar
    by 바람의종
    2009/03/18 by 바람의종
    Views 5095 

    그대도 나처럼

  27. No Image 18Mar
    by 바람의종
    2009/03/18 by 바람의종
    Views 7483 

    민들레 뿌리 - 도종환 (14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