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5010 추천 수 1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그래서 봄에는 모든 것들이 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못가의 풀들은 죽었다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자세히 보세요. 그 풀들은 누렇게 시들어 몸을 땅바닥에 바짝 붙인 채 겨울을 보낸 뒤 봄이면 다시 맨 아래쪽부터 서서히 푸른빛을 끌어올려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풀들이 다 푸르러 진 뒤에 그 풀을 보는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합니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았을 때부터 봄이 들녘에 완연해 질 때까지 풀의 모습을 지켜 본 사람은 그걸 볼 수 있습니다. 아래쪽부터 푸른 물을 끌어올리며 조금씩 몸을 바꾸어 가는 풀의 모습을. 줄기의 삼분의 일 쯤은 푸른빛으로 바꾸고 윗부분은 아직 누런빛이 남아 있는 풀들을 본 사람은 풀이 어떻게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봄은 그렇게 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계절입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제 모습을 찾는 계절입니다.
일찍이 김광섭 선생은 「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距離)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 김광섭 「봄」중에서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서는 계절. 그게 봄이라고 김광섭 선생은 노래했습니다. 모든 사물이 자기의 근원을 생각하고 그 근원을 향해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계절이 봄이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나무 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꽃은 꽃의 모양으로 돌아오고 산은 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계절인 것입니다.

죽은 것과 산 것이 그 근원에서 서로 상견례를 이루는 계절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죽음과 삶이 하나가 되어 만나 인사를 나눈다는 말은 얼마나 의미가 깊습니까? 그 둘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흘러오고 흘러가며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며, 죽음의 끝이 곧 삶의 시작이요 삶의 끝이 곧 죽음의 시작이지만, 실제로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서로 이어지고 윤회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계절이 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자연처럼 근원으로 돌아와야 하는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삭막한 겨울을 보내느라 움츠려들고 강퍅해진 모습 말고 새 싹이 움트고 푸른 순이 돋아나며 다시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만 풀리고 계곡의 얼음만 녹는 계절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모든 거리가 다 풀리는 계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갈라선 것까지도 돌아와야 하고, 서운하게 갈라진 것들도 다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가슴을 녹이는 훈풍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먼저 꽃피기를 기원하는 계절. 말없이 자연의 질서를 따르며 끊임없이 깨어 움직여 거듭거듭 새로 태어나는 계절. 이 봄은 모두에게 그런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3590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2623
2623 감동과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사람 風文 2023.02.11 251
2622 감동하는 것도 재능이다 바람의종 2010.11.19 3706
2621 감미로운 고독 風文 2019.08.22 654
2620 감사 훈련 風文 2022.01.09 231
2619 감사 훈련 風文 2023.11.09 370
2618 감수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람의종 2011.04.01 4416
2617 감정을 적절히 드러내는 법 風文 2021.10.09 339
2616 감정이 바닥으로 치달을 땐 風文 2020.05.02 479
2615 감춤과 은둔 風文 2015.08.20 10557
2614 감탄하는 것 바람의종 2012.04.11 5053
2613 갑자기 25m 자라는 대나무 바람의종 2012.01.13 5923
2612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30대 남성 風文 2020.05.22 714
2611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 바람의종 2009.04.25 5472
2610 같이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 바람의 소리 2007.08.31 8580
2609 개 코의 놀라운 기능 바람의종 2008.05.08 8631
2608 개울과 바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9103
2607 개울에 물이 흐르다 바람의종 2009.08.27 5301
2606 개척자 바람의종 2011.02.10 4116
2605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바람의종 2009.09.21 5496
2604 갱년기 찬가 風文 2022.12.28 343
2603 거기에서 다시 일어서라 風文 2019.08.16 649
2602 거룩한 나무 風文 2021.09.04 193
2601 거울 선물 風文 2019.06.04 562
2600 거울 속의 흰머리 여자 風文 2023.08.22 1638
2599 거울과 등대와 같은 스승 風文 2022.05.23 33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