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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 할 일 - 도종환 (124)



"참 기쁜 일이다. 이렇게 느끼고 싶을 때가 있죠?

선생님은 어떤 때 그런 기쁨을 느끼세요?" 연초에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대답할 말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빨간 신호등이 제 바로 앞에서 파란 신호등으로 바뀔 때에요. 우리 인생길에서도 앞 사람들은 길을 건너갔는데 당신은 거기 서라는 신호를 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반대로 이제 멈추어야 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갈 수 있도록 신호가 바뀌었을 때 그런 때 참 기뻐요."

--저는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기쁨을 느끼죠. 한동안 글이 안 쓰여지다가 어느 날 시 한 편을 완성했을 때 그럴 때 말이에요.

"또 있어요. 바위틈에 꽃이 피어 있는 걸 볼 때나 보도블록 사이에 작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요."

--한동안 잊었던 제자들이 어른이 다 되어 연락이 왔을 때나 전화나 편지로 안부를 물어올 때나 꼭 지금의 내 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글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나이든 사람끼리 어린애처럼 그런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그동안 작은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속상해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주위에 늘 내가 하는 일을 알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걸 기뻐해야겠습니다.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힘과 재능을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이들이 남의 아이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아서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비뚤게 크지 않고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남보다 더 튼튼하거나 빼어난 몸매를 가지지 못했다고 주눅들 때도 있지만 병원 문을 나설 때면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쁨. 엷은 햇빛으로 꽃 한 송이를 기를 수 있는 기쁨. 추운 겨울날 따스한 털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기쁨. 하루에 다만 몇 분이라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쁨.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엔 기뻐할 일들이 많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반갑고 기쁜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한 통의 편지와 같은 사람. 얽혀 있는 일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주는 사람.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멀리서 예쁜 카드와 함께 배달되어 온 꽃바구니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일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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