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5307 추천 수 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따뜻한 사람의 숨결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옷 속으로 스미는 한기가 몸을 부르르 떨게 합니다. 장작을 더 가지러 가려고 목도리를 두르다가 윗집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건 장작불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입니다. 김치찌개에 냉이국을 차려 놓은 소박한 저녁상이지만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많이 먹어야 배부른 게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잘 먹는 게 아닙니다. 함께 먹어야 맛이 있고 나누어 먹어야 즐겁게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리역에서 멈췄다가
김제 외애밋들 지평선을 지나는 비둘기호를 타고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하나쯤 옆 자리 아이에게 주고나서
내다보는 초겨울 들이여
빈 들 가득 입 다문 사람의 숨결이여
아무리 모진 때 살아왔건만
순된장이여 진흙이여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여

고은 시인은 「목포행」이란 시에서 아무리 모진 때를 살아왔어도 변함없는 것은 '따뜻한 사람의 숨결' 이라고 합니다. 역마다 멈춰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가다가도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옆자리 아이와 나누어 먹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사람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열차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열차입니다. 이리에서 출발하여 김제평야를 완행의 속도로 지나가는 길은 지루하고 먼 길입니다. 그 길을 입 다물고 가는 사람들은 진흙 같은 사람들입니다. 순된장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세월이 와도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황량해진 들판 위로 바람만이 몰아쳐도 달걀 하나라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이들이 부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된장냄새 아니, 사람 냄새 나는 이들입니다. 나도 오늘 저녁 찐 달걀 껍질을 벗기고 싶습니다. 하얀 달걀 속살에 소금 발라 한 입 베어 물고 싶습니다. 그러다 한 개는 옆 자리에 있는 이에게 건네고 싶습니다. 나도 저녁상 차려 놓고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쳐 부르고 싶습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6360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5398
2702 긍정적 목표가 먼저다 風文 2020.05.02 492
2701 작은 긁힘 風文 2019.08.07 493
2700 좋은 독서 습관 風文 2023.02.03 493
2699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風文 2019.08.07 494
2698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그리스의 자연 風文 2023.04.17 494
2697 고향을 다녀오니... 風文 2019.08.16 495
2696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風文 2019.08.10 496
2695 '몰입의 천국' 風文 2019.08.23 496
2694 살아 있음을 보여 주세요 風文 2020.05.03 496
2693 따뜻한 맛! 風文 2022.12.16 496
2692 문병객의 에티켓 風文 2023.01.09 497
2691 내 옆에 천국이 있다 風文 2019.06.19 498
2690 선택의 기로 風文 2020.05.14 498
2689 아이들이 번쩍 깨달은 것 風文 2022.01.28 498
2688 요청에도 정도가 있다 風文 2022.09.24 498
2687 쉼이 가져다주는 선물 風文 2023.01.25 498
2686 무화과 속의 '작은 꽃들' 風文 2023.06.13 498
2685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風文 2023.08.24 498
2684 나를 버린 친모를 생각하며 風文 2023.02.16 499
2683 자부심과 자만심의 차이 風文 2023.03.16 499
2682 춤을 추는 순간 風文 2023.10.08 499
2681 밥 하는 것도 수행이다 風文 2019.06.21 500
2680 그냥 느껴라 風文 2019.08.21 500
2679 이루지 못한 꿈 風文 2020.05.02 500
2678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風文 2022.05.18 50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