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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형들에게 배운 민화투는 재미있었습니다. 아, 민화투 말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뻥이나 육백이라는 화투놀이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숫자를 더하고 빼고 계산하는 일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걸 배우는데다가 이기고 지는 일이 보태져 있어서 승부욕 같은 걸 갖게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반복되는 긴장과 이완의 경험도 할 수 있었고 이기는 자의 태도와 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노인들은 담요를 접어 깔고 화투로 재수를 떼보는 일도 하였는데 그걸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고스톱이나 결국 도박이 되어버리는 돈내기화투로는 가지 못하였습니다. 당장 손에 지닌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잔돈이 있다 하더라도 지니고 있는 돈이 없어서 뒷심이 없었습니다. 뒷심이 없으면 지를 수 없고 그러면 오기와 허세만으로 계속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은 통하지만 결국은 가진 것 다 날리고 뒷자리로 물러나게 됩니다.

젊어서 "고스톱 칠 줄 모르는 놈은 사위로 삼지 말라."는 말을 듣고 부잣집 딸 만나 장가가긴 틀렸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펀드와 주식 모르는 사람은 사람 축에 끼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든 오랜만에 친척이나 형제들이 모이는 자리든 그쪽으로 화제가 옮겨가면 나는 아는 게 없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 찾을 일이 있어 은행에 가면 창구직원들이 리플렛을 보여주며 새로운 상품에 투자하라고 권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좋은 땅 나왔는데 사지 않겠느냐?'고 전화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아파트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아 부자들은 입이 벌어지고 서민들은 자기집값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동안, 전화나 인터넷으로 돈 갖다 쓰라는 광고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타짜라는 드라마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여기저기 돈이 넘쳐나는 듯한 분위기, 돈을 대출받아 투자하면 금방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들뜬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금융당국도 그랬고 국가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거품은 반드시 꺼지기 마련입니다. 건전한 예금과 자산 없이 부채 위에서 키워온 거품인데 어떻게 꺼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융자본이 마음대로 활개칠 수 있게 규제를 풀어주고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동안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만 쳐다보고 있다가 쫄딱 망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대박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쪽박 차는 사람도 엄청나게 생겨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 '나에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은 다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자빠지는 것이 도박판의 생리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카지노식으로 끌고 가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식 카지노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망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가 몇 년의 시장불안과 실물경제의 막대한 피해와 기업도산과 가계파탄을 초래한 뒤에 서서히 저점을 찍으며 조정되고 재편되는 과정을 겪겠지만, 또다시 거품을 만들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주기적인 위기를 몰고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게 자본의 생리이고 카지노 자본주의의 생리입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앉아 웃고 떠들며 묵내기화투를 치는 사람냄새 나는 겨울밤은 이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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