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672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나는 네게 기차표를 선물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것이 넓고 편안한 길이든 좁고 가파른 길이든 차분하고 담담하게 껴안아 믿음이 가는 친구.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일상에서 벗어나도 좋을 시간이 오면 왕복 기차표 두 장을 사서 한장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또 한 장은 발신인 없는 편지 봉투에 담아 우체통에 넣고는 은밀한 즐거움으로 달력의 날짜를 지워가는 그런 친구. 행선지는 안개짙은 날의 춘천이어도 좋고, 전등빛에도 달빛인줄 속아 톡톡 다문 꽃잎을 터뜨린다는 달맞이꽃이 지천에 널려 있는 청도 운문사이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건 너보다 한걸음 앞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는 것. 그래야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이 불 때마나 지붕에 서 있는 풍향계가 종종걸음치는 시골 간이역,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너를 기다릴 수 있으니까.

 뜬금없이 날아든, 그리고 발신인 없는 기차표에 아마도 넌 고개를 갸웃하겠지. 그리곤 기차여행에 맞추기 위해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의 일을 서둘러 끝내고 나서 청바지에 배낭 하나 달랑 메로 기차를 타리라. 또한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기차의 율동에 몸을 맡긴 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비도시적인 풍경을 보며 바쁜 일상에 함몰되어 지낸 그 동안의 네 생활과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차표 한장에 실어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생각하리라.

 예정된 시간에 기차는 시골 간이역에 널 내려놓을 것이고, 넌 아마도 낯선 지역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과 기분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개찰구를 빠져 나오겠지. 그런 후 너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네가..!?' 하는 말과 함께 함빡 상큼한 웃음을 지을 것이다. 미지의 땅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 발견한 안도감과 일박이일의 여행, 그 신선한 자유를 선물한 사람을 찾아낸 즐거움으로 말이다. 늘 곁에 있지만 바라보는 여유 없어 '잊혀진 품'이 되어 버린 자연속 에서 우리는 또한번 여장을 꾸려 '함께 그러나 따로이'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도시를 떠난 건 바로 이 여행을 시작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리고 일박이일의 여정을 끝냈을 때 우리는 각자의 내면으로 향한 고독한 여행으로부터 무사히 돌아왔음을 축하하며 우리 일상이 속한 도시를 향해 가는 기차에 '함께' 오를 것이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 자기 몫의 삶을 담담히 살아낼 것이다.

 친구야, 너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선물한 차표가 결코 일박이일의 여정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네게 특히 힘들고 고단할때 보내질 선물이라는 것을. 내가 너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 서미애(방송작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3398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2396
69 사람, 생명의 노래 바람의종 2008.03.04 6330
68 사랑 바람의종 2008.03.04 6426
67 '사랑 할 땐 별이 되고'중에서... <이해인> 바람의종 2008.03.01 7248
66 김인숙 <거울에 관한 이야기> 바람의종 2008.02.29 11045
65 엄창석,<색칠하는 여자> 바람의종 2008.02.28 11207
64 박상우 <말무리반도> 바람의종 2008.02.27 9806
63 죽음에 대한 불안 두 가지. 바람의종 2008.02.25 6815
62 나의 아버지는 내가... 바람의종 2008.02.24 7149
61 <죽은 시인의 사회> 中 바람의종 2008.02.23 8407
60 테리, 아름다운 마라토너 바람의종 2008.02.22 8636
59 참새와 죄수 바람의종 2008.02.21 9719
58 사랑을 논하기에 앞서.. 바람의종 2008.02.20 5954
57 이성을 유혹하는 향수, 그 실체는? 바람의종 2008.02.19 9704
56 젊은 날의 초상 中 바람의종 2008.02.19 7969
55 닥터 지바고 중 바람의종 2008.02.18 6486
54 안병무 '너는 가능성이다' 中 바람의종 2008.02.17 10553
53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세계 바람의종 2008.02.16 6492
52 깨기 위한 금기, 긍정을 위한 부정 바람의종 2008.02.15 8554
51 사랑 바람의종 2008.02.15 7638
50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바람의종 2008.02.14 6740
» 나는 네게 기차표를 선물하고 싶다 바람의종 2008.02.13 7672
48 어머니의 한쪽 눈 바람의종 2008.02.12 6034
47 진실한 사랑 바람의종 2008.02.11 7988
46 하늘에서 코끼리를 선물 받은 연암 박지원 바람의종 2008.02.09 13699
45 사사로움을 담을 수 있는 무한그릇 바람의종 2008.02.03 800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