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4.18 11:40

산벚나무 / 도종환

조회 수 12881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산벚나무 / 도종환




아직 산벚나무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개울물 흘러내리는 소리 들으며
가지마다 살갗에 화색이 도는 게 보인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것들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뿐이다
겨울에 대하여
또는 봄이 오는 소리에 대하여
호들갑떨지 않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박해지지 않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요란하지 않았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갈 줄 알았다
절망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듯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면서*


제 시 「산벚나무」입니다. 제가 있는 산방 뒤뜰에는 산벚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봄이면 연분홍 산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는 그 산벚나무가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눈 내리고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을 묵묵히 견뎌 준 게 고마워 나는 산벚나무를 양팔로 꼭 껴안아주고 얼굴을 부빕니다.

산벚나무는 봄이 온다고 호들갑떨지 않습니다. 겨울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굴하거나 경박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고, 길이 조금만 보이면 요란을 떨거나 거만해지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절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용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든 하찮게 여기지 말고 정확하게 응시하며 헤쳐 나가는 일이 중요하지요. 희망을 만났을 때도 원하던 것을 다 이룬 것처럼 들뜨지 말고 과욕을 경계하고 그것이 덫이 되지 않도록 삼갈 줄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묵묵히 겨울을 견디고 아름답게 꽃피운 뒤에도 소박한 자세를 잃지 않는 산벚나무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배웁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3382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2382
119 어린이라는 패러다임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05 6343
118 젖은 꽃잎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02 9446
117 만족과 불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30 5317
116 하나의 가치 바람의종 2008.04.29 6733
115 참는다는 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8 8345
114 입을 여는 나무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5 7104
113 섬기고 공경할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4 6875
112 용연향과 사람의 향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1 9235
» 산벚나무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8 12881
110 자족에 이르는 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6 6676
109 네비게이션에 없는 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4 6935
108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 납니다 바람의종 2008.04.11 6638
107 4월 이야기 바람의종 2008.04.10 9788
106 화개 벚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09 8268
105 다리가 없는 새가 살았다고 한다. 바람의종 2008.04.05 8696
104 달을 먹다 바람의종 2008.05.22 6690
103 편안한 마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20 7312
102 부처님 말씀 / 도종환 윤영환 2008.05.14 6023
101 지하철에서 노인을 만나면 무조건 양보하라 바람의종 2008.05.22 7465
100 로마시대의 원더랜드, ‘하드리아누스의 빌라’ 바람의종 2008.05.22 13212
99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라 바람의종 2008.05.22 6848
98 내가 행복한 이유 바람의종 2008.05.13 5030
97 개 코의 놀라운 기능 바람의종 2008.05.08 8621
96 원초적인 생명의 제스처, 문학 바람의종 2008.05.06 8698
95 시간은 반드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바람의종 2008.04.29 754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