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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15:51

4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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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urinet.org/sub_read.html?uid=5779§ion=section4














4월 이야기
 

이강순
 












▲ .......     ©이강순
 

 꽃잎이 진다.

 내 얼굴로, 내 손등으로, 내 어깨 위로 눈송이가 내리듯 그렇게 소리 없이 진다. 향기롭다. 첫사랑 같은 꽃잎의 애틋함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걷고 또 걷는다. 푸른 호수 위로 노니는 연분홍 꽃잎을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라본다. 그러다가 이내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부신 하늘을 배경으로 거친 가지마다 희디흰 꽃송이를 매달고 나무는 서 있다. 지난겨울 이들은 수많은 꽃눈을 가슴에 품고 이 봄날을 기다려왔겠지. 한순간 피었다 무참히 물결 위로, 땅 위로 지고 마는, 이 한순간을 위하여 그토록 모진 겨울을 돌아 내 앞에 선 것이 아닌가. 잠시 화사한 미소를 남기려고 그토록 긴 날을 품고 온 한 송이 꿈을 어찌 그냥 지나쳐보고 갈 수 있겠는가.

 사진기를 꺼내든다. 물결로 땅으로 돌담으로 마구 떨어진 꽃잎을 렌즈 안으로 밀어 넣는다. 대여섯 살 쯤으로 보이는 꼬마가 작은 손으로 꽃잎을 줍고 또 줍는다. 그 아이도 내 카메라에 담는다.

 나는 그때야 4월을 줍기 시작한다.

 주울수록 내 손아귀 안에 가득 채워져 가는 꽃잎들처럼, 내 생애에 만난 4월이 순식간에 내 가슴에 채워지기 시작한다. 무수히 피었다 지는 꽃잎의 무성함에 눈부셔 하던 유년의 봄날,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던 사춘기의 아련한 봄날, 삶의 갈림길에서 길을 찾던 내 청춘의 봄날들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유년의 우리 집은 야트막한 돌계단 스물두 개위에 있었다. 돌계단 옆에는 키가 아주 큰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살구꽃이 피면 돌계단은 온통 연분홍 꽃잎으로 융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우리 집 장독대와 돌계단을 눈부시게 해주었던 봄. 장독 위에 떨어지는 꽃잎을 바구니에 주워 담으며 유년의 4월을 보냈다. 살구꽃 복사꽃이 지고, 돌계단에 꽃잎 융단도 사라지고 오빠가 심어놓은 마당 끄트머리 자목련 잎이 숲을 이룰 즈음 동산 위에 우뚝 선 거대한 돌배나무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돌배 꽃이 피면 온 마을은 달빛처럼 환했다. 아침이면 밤새 내린 꽃눈으로 마당은 눈부시게 하얬고, 아버지가 싸리비로 나비 같은 꽃잎을 다 쓸어버리고 나면, 어머니 치마폭 같은 흙 마당에 다시 편지처럼 내려와 앉던 희디흰 꽃잎들. 싸리비 앞에 뭉개진 꽃잎을 바라보며 속상해하던 나는 아쉬움에 발로 쓱쓱 문질러보곤 휑하니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은 다시 꽃잎으로 눈이 부셨고 책가방을 그대로 마당에 던져두고 꽃잎 위에 누워 ‘천사처럼, 천사처럼’을 되뇌었다.

 아, 눈부시게 푸른 하늘 위로 환영처럼 나를 이끌던 꽃잎들.

 눈을 감았다. 꽃잎 위로 내려앉은 수많은 영상이 나를 이끌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꽃잎을 따라 이리저리 나돌았다. 내가 꽃잎과 함께 회오리바람 속에 휘감겼다. 눈물이 났다. 마구간 시렁에 호미와 괭이가 없는 것을 보니 아버지 어머니는 감자 씨를 넣으러 가신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가슴이 묵직해졌다.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떨치지 않는 그것이 나를 짓눌렀다. 표현할 수 없이 아려오는 치통 같은 그것이 알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훗날 알았다.

 눈물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빈집에 들어와 홀로 마당 한가운데 누워 있으면 눈물은 저절로 흘렀다. 꽃잎은 수없이 내 얼굴로 가슴 위로 날아와 앉았다. 나는 꽃잎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았을까. 축축한 봄 마당 환영처럼 이끄는 꽃잎들의 유희에 휘말려 그로부터 나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연중행사처럼 그렇게 앓고 나야만 4월이 지나갔다.



 꽃잎이 진다.

 두 팔을 벌린 내 손바닥으로 내 얼굴로 하염없이 꽃잎이 진다.

 연인들이 향긋한 향기를 풍기며 내 옆을 지나간다. 내가 지금 벚꽃이 흰 눈처럼 내리는 산책로를 홀로 걷는다는 것을 일깨워준 낯선 향기다. 순간 멀리 이국땅에서 더위와 씨름하며 고생하는 그 사람의 얼굴이 꽃잎 위로 스친다. 이 아름다운 봄날의 호사를 나 홀로 즐기는 건 아닌가 하다가도 이렇게 쓸쓸한 봄날을 홀로 맞게 한 그가 밉기도 하다.

 내 나이 스물, 내가 그를 처음 만나던 날도 4월이었다. 꽃눈이 흩날리던 태화강변을 따라갔던 그곳. 그는 훤칠한 키에 배꽃처럼 하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찬송하는 입술과 율동 하는 그의 얼굴은 미소년 같았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초대했다. 꽃이 진 자리마다 연초록 잎이 일렁이는 그의 캠퍼스로-.

 꽃잎이 눈송이처럼 지던 그날, 꽃잎이 휘날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앉은 곳은 꽃잎이 눈처럼 소복하게 내려앉은 자리였다. 손을 잡았다. 진실하고 맑은 그의 얼굴이 꽃송이 같았고, 그의 손을 잡으며 돌배 꽃이 떨어진 유년의 앞마당을 생각하며 꽃잎 위에 누웠다.



 꽃잎 하나 떨어지면 예닐곱 어린아이가 되고, 또 하나 떨어지면 열 두셋의 소녀도 되고, 어느덧 소복하게 쌓인 내 손아귀 안에는 스물 하고도 두셋을 더 먹은 내 청춘의 날이 내려와 앉아있다. 그리고 4월 스무날 연분홍 복사 꽃잎 같은 드레스를 입고 그의 곁으로 걸어가던 날도 손바닥 안에 담기는 꽃잎처럼 내 가슴에 차곡하게 담긴다.

 봄날은 언제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가 버렸을까.

 세월은 분분한 낙화 속에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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