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30 03:26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87)
조회 수 10133 추천 수 14 댓글 0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산과 들의 나무들이 황홀하게 물들고 있는 가을입니다. 단풍이 든다는 것은 나무가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나무를 나무이게 만든 것은 나뭇잎입니다. 꽃이나 열매보다 나무를 더 가까이 하고, 나무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나뭇잎입니다. 꽃은 아주 잠깐 나무에게 왔다가 갑니다. 열매도 나뭇잎처럼 오랜 시간 나무와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봄에 제일 먼저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한 것도 나뭇잎이고, 가장 오래 곁에 머물고 있는 것도 나뭇잎입니다.
나뭇잎을 뜨거운 태양 볕으로부터 보호해 준 것도 나뭇잎이지만, 바람에 가장 많이 시달린 것도 나뭇잎입니다. 빗줄기에 젖을 때는 빗줄기를 막아주었고, 벌레와 짐승이 달려들 때는 자기 몸을 먼저 내주곤 했습니다. 나무도 나뭇잎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알겁니다. 나뭇잎은 '제 삶의 이유' 였고 '제 몸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뭇잎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무는 압니다.
그것까지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섭니다. 나는 단풍으로 황홀하게 물드는 나무를 보며, 버리면서 생의 절정에 서는 삶을 봅니다. 방하착(放下着)의 큰 말씀을 듣습니다.
도종환/시인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 風文 | 2023.02.04 | 2938 |
공지 | 친구야 너는 아니 1 | 風文 | 2015.08.20 | 91854 |
269 | 청소 | 바람의종 | 2008.11.03 | 7360 |
268 | 세상사 | 바람의종 | 2008.11.01 | 5851 |
267 | 아홉 가지 덕 - 도종환 (88) | 바람의종 | 2008.10.31 | 5819 |
266 | 백만장자로 태어나 거지로 죽다 | 바람의종 | 2008.10.31 | 7299 |
» |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87) | 바람의종 | 2008.10.30 | 10133 |
264 | 사랑도 뻔한 게 좋다 | 바람의종 | 2008.10.30 | 5923 |
263 | 김성희의 페이지 - 가을가뭄 | 바람의종 | 2008.10.30 | 8309 |
262 |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 바람의종 | 2008.10.29 | 6465 |
261 |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 바람의종 | 2008.10.29 | 5939 |
260 | 혼자라고 느낄 때 | 바람의종 | 2008.10.29 | 7589 |
259 |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 | 바람의종 | 2008.10.27 | 8130 |
258 | 멈출 수 없는 이유 | 바람의종 | 2008.10.25 | 7545 |
257 | 벌레 먹은 나뭇잎 - 도종환 (85) | 바람의종 | 2008.10.25 | 8136 |
256 | 깊이 바라보기 | 바람의종 | 2008.10.24 | 5794 |
255 |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바람의종 | 2008.10.23 | 7801 |
254 | 눈물 속에 잠이 들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 바람의종 | 2008.10.23 | 6997 |
253 | 아무도 가지 않은 길 | 바람의종 | 2008.10.22 | 5832 |
252 | 좋은 생각, 나쁜 생각 | 바람의종 | 2008.10.22 | 8666 |
251 | 아,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 - 도종환 (84) | 바람의종 | 2008.10.22 | 5060 |
250 | 행복의 양(量) | 바람의종 | 2008.10.20 | 6385 |
249 | 그대 이제 꿈을 말할 때가 아닌가 | 바람의종 | 2008.10.20 | 5880 |
248 | 참 좋은 글 - 도종환 (83) | 바람의종 | 2008.10.20 | 6466 |
247 | 단풍 - 도종환 (82) | 바람의종 | 2008.10.17 | 9174 |
246 | 고적한 날 - 도종환 (81) | 바람의종 | 2008.10.17 | 6937 |
245 | 전혀 다른 세계 | 바람의종 | 2008.10.17 | 7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