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992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늘 다니던 길이 갑자기 고적해 보이는 날이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다니던 길인데 그 길이 넓어 보이고 허전해 보입니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길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수많은 바퀴 자국이 오고갔는데, 잠시 보낼 것은 다 보내고 홀로 누워 있는 길을 만나면 그 길이 그렇게 고적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위에 늦은 가을 햇살이 내려와 있으면 오래오래 나도 거기 앉아 있고 싶습니다. 괜찮다면 한참을 누워 있었으면 싶습니다.
  
  저녁 강물을 보면서 오래 전부터 느꼈던 고적함입니다.
  
  끝없이 끝없이 제게 오는 것들을 흘려보내기만 하는 저녁 강물을 보며 강물이 고적해 보이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저 제 것으로 붙잡아 두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고 아낌없이 흘려보냄으로써 생명이 유지되는 강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관용 그 자체입니다.
  
  끊임없이 넓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등을 밀어 주는 동안 비로소 강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기 때문에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노을 등에 진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저녁 강물의 뒷모습은 돌아와 누워도 가슴 깊은 곳으로 고적하게 흘러가곤 합니다.
  
  그런 밤 별빛은 또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요.
  
  하늘 그 먼 곳에서 지상의 아주 작은 유리창에까지 있는 것을 다 내주었는데도 가까이 오는 것은 바람뿐인 저녁. 별들이 차가운 바람으로 몸을 씻고 하얗게 반짝이는 모습은 가을이 깊어 갈수록 우리 마음을 고요히 흔들곤 합니다. 차가운 아름다움. 쓸쓸해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가을별에서 봅니다.
  
  그런 별 아래서 더욱 외로운 날이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도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말할 수 없이 외로운 날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면서, 사람들과 섞이어 흔들리는 저녁차에 매달려 돌아오면서 깊이깊이 외로운 날이 있습니다.
  내 안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외로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외로움. 한지에 물이 배어 스미듯 몸 전체로 번져 가는 이 저녁의 고적함.
  
  저녁 무렵의 고적함 속에 끝없이 가라앉는 날이 있습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615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5105
277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2.1 風文 2023.04.20 460
276 내려야 보입니다 風文 2021.09.02 459
275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 風文 2023.04.28 459
274 감사 훈련 風文 2023.11.09 459
273 '좋은 지도자'는... 風文 2020.05.07 458
272 건성으로 보지 말라 風文 2022.01.29 458
271 좋은 관상 風文 2021.10.30 457
270 인생이라는 파도 風文 2022.01.29 457
269 이타적 동기와 목표 風文 2022.02.05 457
268 곡지(曲枝)가 있어야 심지(心志)도 굳어진다 風文 2023.04.06 457
267 그대, 지금 힘든가? 風文 2023.10.16 457
266 '나는 가운데에서 왔습니다' 風文 2021.10.31 456
265 '이틀 비 오면, 다음 날은 비가 안 와' 風文 2022.01.29 456
264 오, 라듐 오, 퀴리 風文 2021.09.02 455
263 바로 말해요, 망설이지 말아요 風文 2022.02.10 454
262 검도의 가르침 風文 2022.02.01 453
261 어머니의 육신 風文 2022.05.20 453
260 피해갈 수 없는 사건들 風文 2022.05.26 453
259 잠깐의 여유 風文 2022.01.26 452
258 무심하게 구는 손자손녀들 風文 2022.02.08 452
257 성냄(火) 風文 2022.06.01 452
256 한 통의 전화가 가져다 준 행복 - 킴벨리 웨일 風文 2022.08.20 452
255 동포에게 고함 風文 2022.06.01 450
254 버섯이 되자 風文 2023.01.03 450
253 마음의 위대한 힘 風文 2023.05.24 45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