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9014 추천 수 1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가을 햇살이 사람의 마음을 맑고 넉넉하게 합니다. 낮에 미술전시회장에 갈 일이 있어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아파트 입구에 옮겨 심어 놓은 구절초 몇 송이가 보입니다. '연보랏빛 야생 구절초를 거기 옮겨다 심어 놓은 사람은 누굴까. 작고 소박한 것을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그의 마음이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구절초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 가을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봅니다. 무욕의 그 바람과 무심히 흔들리는 꽃의 자태를 바라보며 이 가을 우리가 더 버려야 할 것을 생각합니다. 걸림이 많고 잡다한 생각이 많아서 불편하게 살고 있는 내 자신이 꽃 한 송이 앞에서 못내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옭아매고 거기 갇혀 늘 힘들게 살면서도 그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들국화 한 송이는 산비탈에 피어서도 자신을 자신 이상으로 허세 부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들국화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헛된 것을 바라거나 욕심을 부려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까치는 나뭇가지 사이에 지은 제 집에서 편안합니다. 잔가지를 물어다 지은 집에서 더 큰 집을 꿈꾸며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헛된 왕국을 세울 생각에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른 까치와 싸워 이길까를 궁리하지 않습니다. 남의 손가락질, 남의 비난 때문에 제 둥지에서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실타래처럼 얽혀 풀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고 내 머릿속에는 복잡한 궁리가 많습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계산이 많고 내가 쳐 놓은 울타리와 장벽이 많습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박아 놓은 금기의 표지판이 즐비하고 가지 말아야 한다고 세워놓은 붉은 신호등이 많습니다. 그 길만을 따라 걷고 계산된 몸짓과 표정을 지어가며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날들이 많습니다. 규격에 맞는 구두에 발을 맞춰가며 살아오는 동안 억눌린 맨 가장자리 발가락에 딱딱한 티눈이 생기듯 마음 군데군데 박힌 티눈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오늘은 그런 신발을 벗고 편안한 신발로 갈아 신은 뒤 천천히 걸어 내게 오라고 가을 햇살은 말합니다. 몸을 빠듯하게 조이던 허리띠를 조금 늦추고 여유 있는 차림으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목에 꼭 끼던 단추도 하나 끄르고 목과 어깨에 힘도 빼고 그렇게 오라고 가을바람은 말합니다. 복잡한 머릿속도 비우고 털어내고 가을 들녘으로 나와 보라고 합니다.
  
  코스모스란 코스모스, 과꽃이란 과꽃, 억새풀이란 억새풀 모두가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제 몸을 바람에 맡기고 있어서 가을길이 환하다는 걸 가르쳐 줍니다.
  
  무심이 무엇인가를 알려 줍니다. 쉬고 있으면 마음이 텅 비어지고, 비워야지만 다시 실하게 채울 수 있으며, 그렇게 가득 찰 때 비로소 모든 일이 순서대로 잘 다스려져 간다고 일러줍니다. 그렇게 텅 비워 무심해지면 비로소 고요해 지고, 고요해져야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이게 되며, 제대로 움직여야 얻어지는 것이 있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휴즉허 허즉실 실즉윤의 허즉정 정즉동 동즉득의'(休則虛 虛則實 實則倫矣 虛則靜 靜則動 動則得矣)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무심히 움직이는 마음. 장자 천도편에서 이야기하는 무심(無心)한 동심(動心)이 가을 햇살 속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걸어갈 때 생기는 것임을 가을은 알게 합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5684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4634
2777 아,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 - 도종환 (84) 바람의종 2008.10.22 5123
2776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바람의종 2008.10.22 8758
2775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바람의종 2008.10.22 5893
2774 눈물 속에 잠이 들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바람의종 2008.10.23 7066
2773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바람의종 2008.10.23 7890
2772 깊이 바라보기 바람의종 2008.10.24 5856
2771 벌레 먹은 나뭇잎 - 도종환 (85) 바람의종 2008.10.25 8212
2770 멈출 수 없는 이유 바람의종 2008.10.25 7617
2769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 바람의종 2008.10.27 8238
2768 혼자라고 느낄 때 바람의종 2008.10.29 7700
2767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바람의종 2008.10.29 6030
2766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바람의종 2008.10.29 6531
2765 김성희의 페이지 - 가을가뭄 바람의종 2008.10.30 8398
2764 사랑도 뻔한 게 좋다 바람의종 2008.10.30 5994
2763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87) 바람의종 2008.10.30 10214
2762 백만장자로 태어나 거지로 죽다 바람의종 2008.10.31 7370
2761 아홉 가지 덕 - 도종환 (88) 바람의종 2008.10.31 5892
2760 세상사 바람의종 2008.11.01 5940
2759 청소 바람의종 2008.11.03 7471
2758 "10미터를 더 뛰었다" 바람의종 2008.11.11 7433
2757 그대의 삶은... 바람의종 2008.11.11 6457
2756 안네 프랑크의 일기 - 도종환 (89) 바람의종 2008.11.11 7109
2755 떨어지는 법 - 도종환 (90) 바람의종 2008.11.11 6797
2754 세상은 아름다운 곳 - 도종환 (91) 바람의종 2008.11.11 6461
2753 아주 낮은 곳에서 바람의종 2008.11.11 694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