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9018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성인용품점 도둑사건」(시인 신정민)   2009년 7월 17일





 





아침 일찍 산에 오르는데 검은등뻐꾸기가 웁니다. 꼭 네 음절로 우는데요. 앞의 세 음절은 음 높이가 조금 높고 마지막 한 음의 높이는 조금 낮습니다. 오뉴월 한철 짝을 찾는 검은등뻐꾸기의 소리가 영락없이 홀딱벗고, 홀딱벗고. 그래서 ‘홀딱벗고 새’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네 음절의 많고 많은 말이 있을진대 어찌 모두들 그리 들었는지 재밌는 일입니다.


 


성인용품점을 하는 아무개씨네 가게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성인용품점을 한다는 것이 굳이 비밀일 것까진 없었지만 또 굳이 누구에게 알릴 일도 아니었다는군요. 그래서 도둑맞았단 얘기를 어디 가까운 사람에게 대고 할 수 없어 며칠 앓다가 분실신고는 해야지 싶어 인근 파출소에 갔답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도둑 든 시간이 대충 언제쯤인지, 값은 얼마나 나가는지,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누가 주로 물건을 사 가는지…


생각보다 다양한 물건에 가격도 만만치 않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만, 아무개씨,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는군요. 생소한 품목들 하나하나 받아 적는 경찰관도 씨익-, 잃어버린 물건들 낱낱이 헤야려야 하는 아무개씨도 멋쩍어 씨익-.


전라도 사람도 아닌데 거시기, 거시기가 수차례 설명을 대신하곤 했다는군요.


 


거리에서 성인용품점을 흔히 봅니다. 가게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지요. 그 앞을 지날 때면 제가 갓 결혼한 새댁이었을 때가 가끔 생각납니다. 네덜란드에 여행 다녀온 친구가 사 온 ‘성인용품 거시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지요. 지금이사 자연스럽게 성인용품점이 여기저기 있지만 그때 당시엔 생각도 못해 봤던 것이었습니다. 생긴 것이 영락없이 남성의 ‘그것’ 같은 데다가 내장된 건전지를 작동시키니까 꿈틀꿈틀, 진동을 시작하는데 기겁 반 부끄러움 반에 한참 뒤에야 터져 나온 웃음으로 배꼽 잡았던 때가 있었지요.


  


홀딱벗고 새는, 아니 검은등뻐꾸기는 산사의 스님들이 공부에 집중하는 새벽녘과 저녁에 주로 우는데요. 공부는 않고 게으름만 피우다 세상 떠난 스님이 환생한 새란 말도 있습니다. 홀딱벗고 마음을 가다듬어라. 망상도 지워 버리고, 욕심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홀딱벗고. 나처럼 되지 말고, 정신차려라. 그렇게 듣는다는군요.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결국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이 세상 똑바로 살라는 경고의 소리로 듣기도 한다는군요.


다투고, 며칠 말 않고 지내던 아내에게 미안한 맘으로, 처지고 있는 아내의 가슴께는 건드려 보지도 않고, 윗도리 벗지도 않은 채 아내에게 다가가려니, 하려거든 하는 것처럼 하라는 듯, 처음처럼, 마지막일 것처럼, 맨몸의 첫날밤처럼, 그렇게 하라는 듯 홀딱벗고, 홀딱벗고 초록빛깔로 5월 봄밤에 울어 대더라고 복효근 시인이 노래한 <검은등뻐꾸기의 전언>이 생각납니다.


 


검은등뻐꾸기의 홀딱벗고, 소리를 따라해 보면서 씨익, 웃어봅니다. 아무개씨의 잃어버린 물건, 왠지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필자 소개


 




신정민(시인)


1961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2003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꽃들이 딸꾹』이 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2971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1882
2769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능력 윤안젤로 2013.03.18 9099
2768 착한 사람 정말 많다 風文 2014.11.29 9097
2767 토닥토닥 바람의종 2012.09.14 9094
2766 항상 웃는 내 모습에 자부심을 갖는다 바람의종 2012.09.18 9091
2765 개울과 바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9089
2764 '병자'와 '힐러' 윤안젤로 2013.05.27 9082
2763 한계점 윤안젤로 2013.04.03 9081
2762 소리 風文 2014.11.12 9055
2761 칼국수 風文 2014.12.08 9048
2760 고흐에게 배워야 할 것 - 도종환 (72) 바람의종 2008.09.23 9045
2759 불사신 風文 2014.12.03 9043
2758 어느 한 가로수의 독백 - 우종영 風磬 2006.11.21 9031
2757 공기와 장소만 바꾸어도... 바람의종 2012.06.01 9022
» 「성인용품점 도둑사건」(시인 신정민) 바람의종 2009.07.17 9018
2755 쉬어가라 바람의종 2012.05.18 8986
2754 '짓다가 만 집'과 '짓고 있는 집' 윤안젤로 2013.03.28 8984
2753 들국화 한 송이 - 도종환 (78) 바람의종 2008.10.09 8982
2752 관점 風文 2014.11.25 8978
2751 청년의 가슴은 뛰어야 한다 風文 2014.08.18 8967
2750 그대에게 의미있는 일 바람의종 2012.12.17 8955
2749 길 떠나는 상단(商團) 바람의종 2008.06.23 8937
2748 '보이는 것 이상' 윤영환 2013.05.13 8936
2747 엄마의 기도상자 바람의종 2013.02.14 8904
2746 위대한 당신의 위대한 판단 바람의종 2012.12.21 8890
2745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라 윤안젤로 2013.03.13 888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