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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11월 25일) 광주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한주)는 이른바 '오송회(五松會)' 라는 이름의 이적단체를 결성,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고 불온 유인물을 탐독한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은 조성용(71)씨 등 관련자 9명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전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리면서 이례적으로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전두환 정권 시절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버스에서 발견된 오장환 시집 『병든 서울』의 필사본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이광웅 시인이 신석정 시인 집에 있는『병든 서울』을 빌려와 필사한 것으로 군산 제일고 동료교사인 박정석 선생이 복사해 갖고 있다가 한 제자가 빌려가지고 다니다 버스에 두고 내렸다고 합니다. 버스 안내양이 이 유실물을 경찰에 갖다 주었는데 경찰이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 교수는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 등의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고 진단했습니다.

경찰은 큰 기대를 갖고 내사를 시작했고 시집 겉장을 싼 종이가 인문계고등학교 국어 시험문제인 것에 주목하여 석 달 이상을 추적한 끝에, 이광웅 시인 등 독서클럽을 꾸린 교사들을 구속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탄원서에 의하면 그들은 구속된 상태에서 북한과의 연계, 광주항쟁의 중심 인물인 윤한봉과의 관계 등을 추궁 받으며 통닭구이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처음에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나중에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매달렸다"고 말했습니다.

그해 4월 19일 이들 중 몇 명이 학교 뒷산에서 4ㆍ19가 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며 막걸리를 마시고 조출한 '4ㆍ19 기념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때 5ㆍ18 이야기가 나왔고 희생자를 위해 잠시 묵념을 했는데, 막걸리와 묵념이 '5ㆍ18 위령제'가 됐고, 그곳이 마침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있던 곳이었다는 이유로 '오송회(五松會)'가 된 것을 기소되면서 알게 됐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오송회라는 반국가단체 이름도 당사자들이 아닌 경찰이 만들어준 것입니다.

『병든 서울』이란 시집과 거기 실려 있는 같은 제목의 시는 해방 직후의 우리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입니다. 해방 직후의 현실을 바라보는 주관적 심정이 가장 강렬하게 표출되어 있으면서 그것이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시적 진정성 이라는 점 때문에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심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입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병기, 정지용, 임화, 조벽암, 권환, 김기림은 『병든 서울』이 '과도기 시의 한 달성'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습니다.

경찰에서 문제 삼은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 인민의 힘으로 하나 되는 새 나라"는 단순한 공산주의 선전문구가 아닙니다. 이 시를 쓴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29일이며 여기서 이야기하는 새 나라는 근대국가 건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장환이 월북시인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 경찰은 더 의심을 했을 법도 합니다. 당시 오장환 시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잘 운영되어 두 개의 정부가 아닌 통일된 나라가 건설되기를 바라는 정치적 입장을 가졌고 이를 위한 문화 활동을 하다,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이들에 의해 모진 테러를 당했습니다. 생존이 절박해진 상황에서 테러를 피하고 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간 곳이 남포 적십자 병원이었고, 거기서 치료를 받다가 모스크바 볼킨 병원으로 다시 옮겨갔고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에 병사합니다.

당사자들은 불가피한 탈출이었다고 하고 우리는 그것을 월북이라고 합니다. 오장환 시인은 북한 문학사에서 단 한 줄도 기록해 주지 않는 시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월북시인이라 하여 시집을 소지하고 있는 것조차 문제가 되는 시대를 산 것입니다.

오직 이념의 잣대만으로 사람을 가르고 고문하고 감옥살이를 시키고 사회에서 매장하는 야만의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합니까?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다."고 했지만 사회 전체가 그런 보편적 정의를 향해 가야 합니다. 당시 주모자로 몰렸던 이광웅 시인은 7년 징역살이 후 복직했다가 다시 전교조관련으로 해직 된 후 맘 고생 몸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참으로 순하고 조용하고 나직나직했던 이광웅 시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학교 때부터 수재였고 착하고 진실했던 그는 허리에 도끼날이 박힌 소나무가 되어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무죄야!" 하는 소리를 구천에서도 들었을까요?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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