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람의 숨결 - 도종환 (107)

by 바람의종 posted Dec 1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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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람의 숨결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옷 속으로 스미는 한기가 몸을 부르르 떨게 합니다. 장작을 더 가지러 가려고 목도리를 두르다가 윗집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건 장작불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입니다. 김치찌개에 냉이국을 차려 놓은 소박한 저녁상이지만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많이 먹어야 배부른 게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잘 먹는 게 아닙니다. 함께 먹어야 맛이 있고 나누어 먹어야 즐겁게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리역에서 멈췄다가
김제 외애밋들 지평선을 지나는 비둘기호를 타고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하나쯤 옆 자리 아이에게 주고나서
내다보는 초겨울 들이여
빈 들 가득 입 다문 사람의 숨결이여
아무리 모진 때 살아왔건만
순된장이여 진흙이여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여

고은 시인은 「목포행」이란 시에서 아무리 모진 때를 살아왔어도 변함없는 것은 '따뜻한 사람의 숨결' 이라고 합니다. 역마다 멈춰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가다가도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옆자리 아이와 나누어 먹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사람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열차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열차입니다. 이리에서 출발하여 김제평야를 완행의 속도로 지나가는 길은 지루하고 먼 길입니다. 그 길을 입 다물고 가는 사람들은 진흙 같은 사람들입니다. 순된장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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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세월이 와도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황량해진 들판 위로 바람만이 몰아쳐도 달걀 하나라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이들이 부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된장냄새 아니, 사람 냄새 나는 이들입니다. 나도 오늘 저녁 찐 달걀 껍질을 벗기고 싶습니다. 하얀 달걀 속살에 소금 발라 한 입 베어 물고 싶습니다. 그러다 한 개는 옆 자리에 있는 이에게 건네고 싶습니다. 나도 저녁상 차려 놓고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쳐 부르고 싶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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