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5244 추천 수 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따뜻한 사람의 숨결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옷 속으로 스미는 한기가 몸을 부르르 떨게 합니다. 장작을 더 가지러 가려고 목도리를 두르다가 윗집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건 장작불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입니다. 김치찌개에 냉이국을 차려 놓은 소박한 저녁상이지만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많이 먹어야 배부른 게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잘 먹는 게 아닙니다. 함께 먹어야 맛이 있고 나누어 먹어야 즐겁게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리역에서 멈췄다가
김제 외애밋들 지평선을 지나는 비둘기호를 타고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하나쯤 옆 자리 아이에게 주고나서
내다보는 초겨울 들이여
빈 들 가득 입 다문 사람의 숨결이여
아무리 모진 때 살아왔건만
순된장이여 진흙이여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여

고은 시인은 「목포행」이란 시에서 아무리 모진 때를 살아왔어도 변함없는 것은 '따뜻한 사람의 숨결' 이라고 합니다. 역마다 멈춰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가다가도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옆자리 아이와 나누어 먹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사람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열차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열차입니다. 이리에서 출발하여 김제평야를 완행의 속도로 지나가는 길은 지루하고 먼 길입니다. 그 길을 입 다물고 가는 사람들은 진흙 같은 사람들입니다. 순된장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세월이 와도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황량해진 들판 위로 바람만이 몰아쳐도 달걀 하나라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이들이 부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된장냄새 아니, 사람 냄새 나는 이들입니다. 나도 오늘 저녁 찐 달걀 껍질을 벗기고 싶습니다. 하얀 달걀 속살에 소금 발라 한 입 베어 물고 싶습니다. 그러다 한 개는 옆 자리에 있는 이에게 건네고 싶습니다. 나도 저녁상 차려 놓고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쳐 부르고 싶습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3286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2269
344 어떤 이가 내게 정치소설가냐고 물었다 - 이외수 바람의종 2008.12.28 8816
343 눈 - 도종환 (112) 바람의종 2008.12.27 7659
342 희망의 스위치를 눌러라 바람의종 2008.12.27 8067
341 이제 다섯 잎이 남아 있다 바람의종 2008.12.26 5435
340 외물(外物) 바람의종 2008.12.26 6244
339 예수님이 오신 뜻 - 도종환 (111) 바람의종 2008.12.26 5181
338 자랑스런 당신 바람의종 2008.12.23 7399
337 진흙 속의 진주처럼 바람의종 2008.12.23 8709
336 하늘에 반짝반짝 꿈이 걸려있다 바람의종 2008.12.23 5671
335 일곱 번씩 일흔 번의 용서 - 도종환 (110) 바람의종 2008.12.23 4682
334 초겨울 - 도종환 (109) 바람의종 2008.12.23 8046
333 슬픔의 다음 단계 바람의종 2008.12.19 5165
332 굿바이 슬픔 바람의종 2008.12.18 7724
331 바다로 가는 강물 - 도종환 (108) 바람의종 2008.12.18 7151
330 사랑을 받고 큰 아이가 사랑을 베풀 줄 안다 바람의종 2008.12.17 5393
329 젊은 친구 바람의종 2008.12.17 5091
» 따뜻한 사람의 숨결 - 도종환 (107) 바람의종 2008.12.15 5244
327 기초, 기초, 기초 바람의종 2008.12.15 6171
326 신의 선택 바람의종 2008.12.15 4739
325 4.19를 노래한 시 - 도종환 (106) 바람의종 2008.12.12 7057
324 "용기를 잃지 말고 지독하게 싸우십시오!" 바람의종 2008.12.12 5889
323 생긋 웃는 얼굴 바람의종 2008.12.11 4982
322 대추 바람의종 2008.12.10 5411
321 한 해의 마지막 달 - 도종환 (105) 바람의종 2008.12.10 5323
320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어 바람의종 2008.12.09 466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