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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달――십이월은 설레임과 고통으로 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가슴 아팠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정리하고픈 마음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하는 달입니다. 자신의 나이 앞에 담담하고 겸허하게 서 있게 하는 달입니다. 삶의 무게랄까 인생 그 자체랄까 그런 것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달입니다. 특히나 이십대에서 삼십대 또는 삼십대에서 사십대로 넘어가는 해의 십이월은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멈추게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야하던 해의 겨울,
"난 앞으로 몇 년 더 스물아홉에 머물러 있을래." 내가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하자 친구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응, 올해는 이 년째 스물아홉, 내년에는 삼 년째 스물아홉이에요. 그렇게 말하겠단 말이야."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이쯤에서 한동안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겁니다.

삼십대에서 사십대로 넘어가던 해의 십이월 마지막 밤은 조용히 술 한 잔을 마셨습니다. 어떤 비장한 생각 같은 것도 들고 나이에 대한 무거운 책임 같은 것도 동시에 느끼게 해서였습니다. 어떤 나이든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일 텐데도 십이월의 하루하루는 그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 어릴 적 우리 아버지의 나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책임져야 할 내 얼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십이월의 복판에 서면 꼭 한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디 내가 공연히 초조하지 않아야겠다는 것, 제 나이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리거나 행동과 생각을 미리 선험적인 나이의 중량에 묶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런 생각 말입니다. 나이에 미리 겁먹지 말고 다가오는 시간 앞에 조용히 깊어져 가는 모습을 지니고 싶은 것입니다.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세월 앞에 은은한 모습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십이월은 우리를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어리석은 욕심들을 버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눈을 씻고 다시 한 번 세월을 정갈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십이월은 한 해 동안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에 싸여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다시 보이는 달이기도 합니다. 나뭇잎을 다 버린 나무들이 비로소 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듯 밖으로 향했던 마음들이 자신의 내부 깊은 곳으로 천천히 다시 모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욕망의 수천 개 나뭇잎이 매달렸던 가지 끝에서 나무 둥치로, 나이테가 또 하나 늘어나는 나무의 가운데로 돌아오게 합니다. 본래의 제 생명, 제 자아의 물관부로 돌아오게 합니다. 거기서 들이쉬는 한 모금의 겨울바람. 십이월은 그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살아가야 할 남은 날들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은 그렇게 성급하게, 조바심을 내며 달려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고 십이월에 부는 바람은 옷자락을 잡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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