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242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새해 산행


어수선한 연말이 지나고 또 바쁘게 새해가 왔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연말연시는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보다는 대개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연말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한 각종 송년 모임으로 분주하고, 새해 첫날부터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인사를 하기 위해 바쁩니다. 신정 연휴를 보내면서 조용히 새로운 다짐을 해 보거나 새해 계획을 세울 시간도 없이 쫓기듯 한 해를 시작합니다.

연초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산행을 했습니다.
겨울 산길은 언제 찾아도 좋습니다. 도심 속에서 쫓기는 생활, 무겁고 분주한 생각의 실타래들을 털고 빈 마음으로 산을 대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겨울 골짝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의 신선함이 좋고 참나무 마른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제대로 들려서 좋습니다. 다른 계절의 산행 때와는 다르게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욱 좋습니다. 걸음이 여유로워지고 따라서 마음도 더욱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마음 또한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몇 시간씩 걷다 보면 자연 발걸음도 무겁고 마음도 지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올 한 해는 또 얼마나 힘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산뜻한 걸음,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을 해도 걷다 보면 지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도 원망과 짜증이 생기고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생깁니다. 등에 진 짐도 무거워지고 이 짐을 벗어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 주저앉았는데 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원래 사람의 수명은 서른 살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서른 살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나귀가 달려와 "하느님, 그렇게 오래 살면 저는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줄여 주십시오." 해서 당나귀의 수명을 십이 년 깎아 십팔 년이 되게 했답니다.

그랬더니 개가 달려와 "저는 그렇게 오래 뛰어다닐 수가 없으니 저도 줄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해서 십팔 년을 줄여 십이 년이 되게 하였답니다. 이번에는 원숭이가 달려와 "저는 사람들을 웃기고 재롱이나 떨면서 사는데 늙어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깎아 주십시오." 하여 십 년으로 줄여 주었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께 찾아와 "삼십 년은 너무 짧습니다." 하고 화를 내기에 당나귀와 개, 원숭이에게서 줄인 것을 모두 합쳐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은 팔십이 되었는데, 그 덕택에 사람은 사는 동안 당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고, 개처럼 헐레벌떡 뛰어다녀야 하며, 원숭이처럼 먹을 것을 던져 주는 사람 앞에서 재롱을 떨고 바보짓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올 한 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짐과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나날들과 밥벌이를 해야 할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차곡차곡 쌓이는 일의 성과 속에서 살아 있는 의미를 확인하며, 그것으로 생활의 양식을 벌어 간다면 우리 인생은 그렇게 헛된 노고로 이어지는 삶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독이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가는 거지요. 저 산 저 고개 내가 넘어야 할 곳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올 한 해도 앞으로 나의 인생도 그렇게 걸어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 늘 제일 힘들지만, 그 고개를 넘었을 때의 기쁨 또한 고통 때문에 더욱 커지는 것이니 그렇게 묵묵히 가자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갯마루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산기슭마다 아름다운 눈으로 덮인 주흘산 봉우리가 보였습니다. 비경이었습니다. 저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못보고 앞만 보고 왔구나. 가다가 가끔씩 뒤돌아보면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올해도 또 앞만 보고 걷는 건 아닐는지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앞도 보고 뒤도 보며 여유 있게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6132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5071
377 가을이 떠나려합니다 風文 2014.12.03 8036
376 가을엽서 - 도종환 (73) 바람의종 2008.09.24 7045
375 가을 오후 - 도종환 (94) 바람의종 2008.11.15 8043
374 가슴이 뛰는 삶 윤영환 2011.01.28 4350
373 가슴으로 답하라 윤안젤로 2013.05.13 7689
372 가슴에 핀 꽃 風文 2014.12.24 9153
371 가슴에 불이 붙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바람의종 2011.01.31 4474
370 가슴높이 바람의종 2009.11.15 4633
369 가슴높이 바람의종 2011.07.28 4477
368 가슴 터지도록 이 봄을 느끼며 風文 2023.04.18 380
367 가볍고 무른 오동나무 風文 2021.09.10 302
366 가벼우면 흔들린다 風文 2015.07.02 5598
365 가만히 안아줍니다 風文 2021.10.09 437
364 가난해서 춤을 추었다 風文 2014.12.04 8298
363 가난한 집 아이들 바람의종 2009.03.01 6925
362 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 윤안젤로 2013.04.11 10154
361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風文 2019.08.07 494
360 가끔은 보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바람의종 2008.10.17 6196
359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 도종환 (132) 바람의종 2009.02.18 6435
358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風文 2014.12.24 7045
357 가까이 있는 것들 바람의종 2011.03.09 2858
356 가까운 사람 바람의종 2010.09.24 3041
355 雨中에 더욱 붉게 피는 꽃을 보며 바람의종 2008.07.01 7707
354 윤영환 2011.08.16 4179
353 「화들짝」(시인 김두안) 바람의종 2009.06.30 706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