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079 추천 수 1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기뻐 할 일 - 도종환 (124)



"참 기쁜 일이다. 이렇게 느끼고 싶을 때가 있죠?

선생님은 어떤 때 그런 기쁨을 느끼세요?" 연초에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대답할 말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빨간 신호등이 제 바로 앞에서 파란 신호등으로 바뀔 때에요. 우리 인생길에서도 앞 사람들은 길을 건너갔는데 당신은 거기 서라는 신호를 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반대로 이제 멈추어야 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갈 수 있도록 신호가 바뀌었을 때 그런 때 참 기뻐요."

--저는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기쁨을 느끼죠. 한동안 글이 안 쓰여지다가 어느 날 시 한 편을 완성했을 때 그럴 때 말이에요.

"또 있어요. 바위틈에 꽃이 피어 있는 걸 볼 때나 보도블록 사이에 작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요."

--한동안 잊었던 제자들이 어른이 다 되어 연락이 왔을 때나 전화나 편지로 안부를 물어올 때나 꼭 지금의 내 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글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나이든 사람끼리 어린애처럼 그런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그동안 작은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속상해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주위에 늘 내가 하는 일을 알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걸 기뻐해야겠습니다.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힘과 재능을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이들이 남의 아이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아서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비뚤게 크지 않고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남보다 더 튼튼하거나 빼어난 몸매를 가지지 못했다고 주눅들 때도 있지만 병원 문을 나설 때면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쁨. 엷은 햇빛으로 꽃 한 송이를 기를 수 있는 기쁨. 추운 겨울날 따스한 털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기쁨. 하루에 다만 몇 분이라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쁨.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엔 기뻐할 일들이 많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반갑고 기쁜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한 통의 편지와 같은 사람. 얽혀 있는 일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주는 사람.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멀리서 예쁜 카드와 함께 배달되어 온 꽃바구니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일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3263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2239
394 악덕의 씨를 심는 교육 - 도종환 (133) 바람의종 2009.02.20 6645
393 이글루 바람의종 2009.02.19 6117
392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 도종환 (132) 바람의종 2009.02.18 6362
391 젊어지고 싶으면 사랑을 하라! 바람의종 2009.02.18 5755
390 흐린 하늘 흐린 세상 - 도종환 (131) 바람의종 2009.02.17 7610
389 상상력 바람의종 2009.02.17 6560
388 스트레스 바람의종 2009.02.14 5341
387 겨울 나무 - 도종환 (130) 바람의종 2009.02.14 9132
386 천애 고아 바람의종 2009.02.13 7318
385 천천히 걷기 바람의종 2009.02.12 6729
384 오늘 결정해야 할 일 바람의종 2009.02.12 5466
383 아,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요 (129) 바람의종 2009.02.12 4515
382 불타는 도시, 서울을 바라보며 - 도종환 (128) 바람의종 2009.02.09 5511
381 디테일을 생각하라 바람의종 2009.02.09 4478
380 소개장 바람의종 2009.02.08 5489
379 자작나무 - 도종환 (127) 바람의종 2009.02.06 8772
378 엄마의 주름 바람의종 2009.02.06 5313
377 불과 나무 - 도종환 (126) 바람의종 2009.02.04 6110
376 출발 시간 바람의종 2009.02.03 6981
375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125) 바람의종 2009.02.02 21284
» 기뻐 할 일 - 도종환 (124) 바람의종 2009.02.02 6079
373 핀란드의 아이들 - 도종환 (123) 바람의종 2009.02.02 8183
372 설날 - 도종환 바람의종 2009.02.02 5598
371 황무지 바람의종 2009.02.02 6335
370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 바람의종 2009.02.01 615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