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263 추천 수 1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3232707&Section=04














봄은 먼데서 옵니다.

남쪽 먼 섬 비탈 밭이나 거기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섰던 매화나무 찬 가지에서부터 옵니다. 바람을 타고 옵니다.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자기만 아는 거인」에 나오는 거인처럼 봄이 오는 정원에 높은 담을 쌓고 지내듯 문을 꼭꼭 걸어 닫고 지내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더미 더미 창문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 방 북쪽 창문도 열고 베란다가 있는 남쪽 이중창도 엽니다. 방안 가득 바람을 불러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답답하던 가슴도 풀리고 숨도 깊게 쉬어집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바람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있고, 저녁 바람에는 저녁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목을 파고 들어오던 거리의 냉기 그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걸레가 얼던 월셋방 담 밑의 긴 골목 어둑어둑 하던 벽에 기대서서 꺼진 연탄불이 다시 붙기를 기다리던 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저녁 바람 속에는 노을 묻은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오지 않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던 날들의 아득한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지친 몸 허기진 육신을 추스르며 혼자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와 머리칼을 날리던 샛강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습니다.

봄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는 봄바람에는 봄바람의 냄새가 스며 있습니다. 초년 교사 시절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 학교, 부임 인사가 끝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무렵 혼자 운동장 끝을 따라 거닐다 만났던 바람의 냄새가 떠오릅니다.

차가운 기운은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따스한 몸으로 바뀌지 않은 봄바람이 앞산 기슭 온갖 나무와 꽃들의 묵은 껍질을 벗기려고 산비알을 따라 올라가다 내려오기를 여러 차례 꽃망울을 완전히 벗기진 못하고 내 곁에 내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낯설음도 곧 익숙해지겠지, 갑자기 바뀐 환경에도 서서히 적응해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바람에 묻어오던 흙냄새 바람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낯익은 냄새에 실려 봄은 옵니다. 개울물이 땅을 녹이며 다시 살아난 벌레들과 물고기 새끼, 도롱뇽알, 개구리의 앳된 비린내를 한데 섞어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2573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1468
419 '사랑한다' 바람의종 2009.03.14 6137
418 정신적 지주 바람의종 2009.03.14 6235
417 없는 돈을 털어서 책을 사라 바람의종 2009.03.14 4344
416 비교 바람의종 2009.03.14 4500
415 마음의 평화 바람의종 2009.03.14 4376
414 통찰력 바람의종 2009.03.14 7142
413 그래도 사랑하라 바람의종 2009.03.14 5020
412 봄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 도종환 (142) 바람의종 2009.03.14 4992
411 봄은 차례차례 옵니다 - 도종환 (141) 바람의종 2009.03.14 6174
410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 도종환 (140) 바람의종 2009.03.14 6490
409 봄은 낮은 데서 옵니다. - 도종환 (139) 바람의종 2009.03.08 5416
» 봄은 먼데서 옵니다. - 도종환 (138) 바람의종 2009.03.08 7263
407 라일락 향기 바람의종 2009.03.03 6642
406 꿈의 징검다리 바람의종 2009.03.03 5083
405 욕 - 도종환 (137) 바람의종 2009.03.03 6091
404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 도종환 (136) 바람의종 2009.03.01 6643
403 새 - 도종환 (135) 바람의종 2009.03.01 6010
402 저녁의 황사 - 도종환 (134) 바람의종 2009.03.01 10471
401 아침의 기적 바람의종 2009.03.01 5132
400 아빠의 포옹 그리고 스킨십 바람의종 2009.03.01 5357
399 몸 따로 마음 따로 바람의종 2009.03.01 4400
398 마음의 온도 바람의종 2009.03.01 5202
397 바람 부는 날 바람의종 2009.03.01 5713
396 가난한 집 아이들 바람의종 2009.03.01 6870
395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바람의종 2009.02.21 655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