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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그라시아스!」(소설가 함정임)   2009년 6월 22일_서른아홉번째





 





20대 후반의 J가 파리에서 거금을 들여 마드리드행 럭셔리 야간열차에 올라탄 것은 순전히 피카소의 <게르니카> 때문이었다. J가 마드리드 여행 경비의 반에 해당하는 거금을 럭셔리 침대칸에 바친 것은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스페인 혈통의 집시들이 야간열차에 올라타 여행자들의 가방을 노린다는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J는 이른 아침 마드리드에 도착해 호텔에 여장을 풀고, 곧장 목적했던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 프라도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J가 파리의 루브르 미술서점에서 읽은 바로는, 피카소가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에 작품을 줄 수 없다고 하여 미국에 있다가 프랑코 정권이 물러난 뒤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프라도 미술관 어디에서도 <게르니카>는 눈에 띠지 않았다. J는 폐관 시간에 떠밀려 미술관 밖 벤치에 실망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훤칠한 키에 구릿빛 피부, 구불거리는 머릿결의 유럽 청년이었다. 그는 호의적인 표정으로 혹시 도와 줄 것이 없느냐고 J에게 물었다. J는 망설이다가 <게르니카>를 찾아 먼길을 달려왔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허탈하게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게르니카>는 일주일 전에 인근 소피아 갤러리로 이전했다고 알려 주면서 내일 함께 가 보자고 제안했다. 유럽의 문화로 보면 청년의 제안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파리에서부터 스페인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잔뜩 키워 온 J로서는 청년의 정보는 고마웠지만, 낯선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J는 아쉽게도 예약된 파리행 열차 시간 때문에 힘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청년은 그럼 개관 시간에 맞춰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약속을 하고 말았다. 청년은 J의 무릎 위에 놓인 니콘 카메라에 호기심을 보였고, 자신이 아는 일본 영화와 오노 요코에 대해 말했다. 청년이 이야기를 하며 카메라에 눈을 줄 때마다 J는 내심 그를 경계하며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J가 어느 정도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고 확신했는지 약속이 없으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J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만큼 호방한 성격이 아니었고, 그의 호의를 경계하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었다. J는 예약해 놓은 공연이 있어서 가 보아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청년은 호세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었다. J는 어정쩡하게 그의 손을 잡으면서 속으로 내일 약속을 걱정했다. <게르니카>는 보아야 하고, 그는 꺼려지고.


 


다음날 10시, 호세는 소피아 갤러리 입구에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태양을 이고 서 있었다. 그는 J가 나타나자 반갑게 반기는가 싶더니 이내 안타까운 표정으로 굳게 닫힌 갤러리 문을 가리켰다. 월요일 휴관. J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게르니카>도 <게르니카>지만 호세라는 청년이 거대한 장애처럼 여겨졌다. 호세는 자신도 미처 월요일임을 깨닫지 못했다고 사과하면서 그래도 기념으로 사진을 찍지 않겠느냐고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J는 내심 화들짝 놀랐지만, 국제적인 감각을 익힌 한국의 젊은 여성답게 호세를 의심하는 태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은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호세는 J의 의사를 존중했고, 이왕 온 김에 이곳 소피아 공주의 정원과 호수가 멋지니 배를 타지 않겠느냐고 또 제안했다. 호세의 거듭되는 제안에 J는 도대체 왜 거금을 들여 마드리드에 왔던가, 심각하게 후회하며, 그러나 겉으로는 국제적인 감각을 익힌 한국의 젊은 여성의 품위로서 유연하게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J가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에 복귀하던 날, 그녀는 자리를 비운 동안 받아 놓은 우편물 박스를 열었다. 맨 위에 호세의 두툼한 편지가 놓여 있었다. 헤어지면서 호세가 간절하게 J의 주소를 달라고 해서, 한국에서 사용하던 명함을 주었었다. 봉투를 열어 보니 호세가 그녀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던 <게르니카>의 슬라이드 필름과 엽서, 피카소 화집, 그리고 소피아 갤러리 앞에서 찍은 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태양 아래 미소짓고 서 있는 호세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녀는 그의 순수한 호의를 의심하고, 그의 거듭되는 제안을 거절하느라 쩔쩔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J는 다시 유럽에 가면 제일 먼저 소피아 갤러리를 찾아가겠노라고 마음먹으며 중얼거렸다. 호세, 그라시아스(고마워요)!   















■ 필자 소개


 




함정임(소설가)


1964년 김제에서 태어나,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밤은 말한다』『동행』『당신의 물고기』『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중편소설 『아주 사소한 중독』, 장편소설 『행복』『춘하추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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