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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되고 웃음이 있고 재미있으며 좀 가려운」(소설가 성석제)


  2009년 5월 11일_열번째










이 내 몸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국어하고도 고문(古文) 시간은 정말 고문(拷問) 시간이었다. 2, 3학년을 연속해서 고문을 담당한 국어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그야말로 단순명료했다. 새 학기 첫 시간, 그는 고문의 개념과 국어 과목에서의 중요도, 고문을 공부해야 하는 당위성에 관해 잠시 이야기하고는 다음 시간까지 외워 올 범위를 정해 주었다. 그리고는 만약 외워 오지 않았을 경우에 우리들(그의 표현대로라면 ‘學童 아해들’)이 받게 될 벌칙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으니 그 다음 시간에 실제 펼쳐진 풍경은 이러하다.


 


그는 삼척(三尺) 길이의 몽둥이를 건들건들 흔들며 교실로 들어와서는 출석부를 펼쳐든다. 그러고는 내키는 대로 아무 번호나 부른다. 그럼 그 번호에 해당하는 학동이 일어나서 외워 오게 한 부분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는 외우는 속도와 어조, 표정에서 진짜 외운 것인지를 순식간에 판별해 내고는 외우기를 중단시키고 그 뒷자리의 학동을 지명한다. 뒷자리 학동이 외우면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대로 그 옆자리, 또 외우면 그 앞자리 하는 식으로 계속 암기가 이어진다. 물론 못 외우는 아해가 있게 마련이다. 그는 오랜 세월 하도 많이 겪어 온 일이라 지겹다는 표정으로 “나와!” 하고 명령한다. 학동 아해가 나오면 그는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리게 한 다음 몽둥이로 엉덩이를 다섯 대 가량 내리친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오랜 경험에서 도출된 계량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수업시간의 길이와 못 외우는 학동의 비율, 몽둥이질이 학동의 가슴에 불러일으킬 파문, 수치감, 몽둥이질하는 사람의 체력 등등이 감안된 숫자인 것이다.


 


그 당시 고문 시간에 암기를 못해서 교사로부터 몽둥이질을 당한 아이들이나 그 학부형이 고문을 받았다고 고소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는 외우라는 걸 대충 외우고는 있지만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다. 차라리 초장에 지명을 당해서 외우지 못하고 다섯 대를 맞고 말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몽둥이질 소리와 외우는 소리 속에 긴장되고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 바로 그게 고문이었다. 그렇지만 매를 맞고 나서 외우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진도를 나간 데까지의 범위 안에서 어디를 외우라고 할지는 선생님 마음이었으니까. 그러므로 고문 시간은 번호 - 암기 - 앞으로 나가거나 외우고 자리에 앉기 - 몽둥이질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걸 정리하면 이렇다.


 


“주번, 오늘이 며칠이냐?”


“10일입니다.”


“10번.”


“예.”


“뭐 해?”


“중얼중얼.”


“제대로 못 외웠군. 나와서 엎드려 뻗쳐.”


“부스럭부스럭(나가는 소리, 멋쩍은 미소와 함께).”


“그 뒷자리. 쪼개는 놈.”


“……”


“나와. 앞으로는 못 외웠으면 자동으로 나오도록. 그 옆.”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됐고. 그 다음 27번.”


 


그러고는 어느 갸륵한 반장 학동이 제 할아버지의 단장을 끊어서 만들어 바친 향나무 몽둥이가 학동들의 엉덩이에 평등한 속도와 강도로 떨어지며 내는 ‘퍽퍽, 퍽퍽퍽’ 소리가 수업시간 내내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선생님에게 고문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정상적으로 고문 수업을 받은 타교 학생들의 그것보다 월등하게 높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학동들끼리의 성적은 거의 평등했다. 어려운 음운 변화나 한자 등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 - 참고서를 참고하는 학생들의 성적이 좀 나은 정도였다.


언어를 학습하는 방법에서 암기는 상당히 효율적이다. 특히 우리말은 외우는 중에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심층적 의미나 다른 단어나 문장과의 연관 등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그 훌륭한 고문 시간에 나는 정말 자발적으로 외워 보고 싶은 것을 발견했는데 그건 교과서가 아닌 참고서에 들어 있었다. 바로 사설시조였다.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 하는 식의 뻔한 주제에 뻔한 형식, 뻔한 표현의 정형시가 아니라 결코 뻔하지 않은,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금방 깨뜨려질 듯하면서도 인장강도가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아슬아슬하게 틀이 유지되고 있어서 긴장되는, 그리고 이야기가 있고 웃음이 있고 재미에 사설이 있는 시조였던 것이다. 외우지는 못했다. 매와 상관없이 외우고는 싶었다. 그때 그걸 외웠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一身이 사쟈 한이 물것 계워 못 견딀쐬.


皮ㅅ겨 가튼 갈랑니 보리알 가튼 슈통니 줄인니 갓 깐니 잔 벼록 굴근 벼록 강벼록 倭벼록 긔는 놈 뛰는 놈에 琵琶 가튼 빈대 삭기 使令 가튼 등에아비 갌다귀 샴의약이 셴 박희 눌은 박희 바금이 거절이 불이 뾰죡한 목의 달리 기다한 목의 야왼 목의 살진 목의 글임애 뾰록이 晝夜로 뷘 때 업시 물건이 쏘건이 빨건이 뜻건이 甚한 唐빌리예셔 얼여왜라.


그 中에 참아 못 견딜손 六月 伏더위예 쉬파린가 하노라.


 


이미 돌아가신 스승의 예에 따르자면 아무런 설명 없이 우리말, 문학의 즐거움을 각자 입속 가득 조용히 누리게 하는 것이 옳겠지만 스승은 언젠가 제자가 스승의 길을 추종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내 나름으로 해석을 해보자면 이렇다.


 


‘이 내 한 몸 살아가자 하니 물것이 많아 못 견디겠네.’ 이 시조의 초장은 보통의 시조처럼 4·4조의 정형성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장이 본론이다.


 


‘피의 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같이 크고 살찐 이, 굶주린 이, 막 알에서 깨어난 이, 작은 벼룩, 굵은 벼룩, 강벼룩, 왜벼룩, 기어다니는 놈, 뛰는 놈에 비파같이 넓적한 빈대 새끼, 사령(관아의 심부름꾼) 같은 등에, 각다귀, 사마귀, 하얀 바퀴벌레, 누런 바퀴벌레, 바구미, 거저리, 부리가 뾰족한 모기, 다리가 기다란 모기, 야윈 모기, 살찐 모기, 그리마, 뾰록이, 밤낮으로 비는 때 없이 물고 쏘고 빨고 뜯거니 심한 당비루(피부병의 일종)보다 어려워라.’


 


이윽고 웅장하고 화려한 종장. ‘그중에서도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은 오뉴월 복더위에 쉬파리인가 하노라.’ 읽어 보면 안다. 왜 웅장하고 화려한지를. 가능하다면 원문으로.


 


이 숱한 물것들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당사자는 얼마나 괴로울까 싶기도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마냥 재미가 있으니 이를 어쩌나. 여기서 ‘물것’들이 ‘사람이나 동물의 살을 물어 피를 빨아먹는 벌레의 총칭’이 아니라 백성을 착취하는 갖가지 부류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하여 풍자가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상징과 풍자로 돌리면 문학작품으로서는 격이 떨어져 버린다.


 


이 작품의 ‘제격’은 수많은 물것을 주워섬겨 대는 천의무봉한 입심이다. 그럼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유희성으로 극복하고 삶의 재미를 찾아내어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작자미상의 사설시조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 문학의 격은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필자 소개




성석제 (소설가)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재미나는 인생』『새가 되었네』『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호랑이를 봤다』『홀림』과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새』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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