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9169 추천 수 1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겨울 나무 - 도종환 (130)


목련나무의 봉오리가 붓끝처럼 휘어진 채 가지 끝에 얹혀 있습니다. 마당을 거닐다가 다가가서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보기엔 붓끝 같지만 실제론 딱딱하였습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이 나뭇가지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산수유나무 꽃눈도 만져보니 마찬가지로 딱딱하였습니다. 겨울을 견디느라 몸 전체로 긴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에 있는 다른 나무들도 다 그럴 겁니다. 앙상한 가지만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그들의 몸은 텅 비어 있습니다. 날이 좀 풀리긴 했지만 겨울이 다 간 건 아닙니다. 몇 번 더 찬바람이 몰려오고 저수지가 다시 얼기도 하겠지요. 그걸 생각하며 빈 몸, 빈 가지로 침묵하고 있는 겨울 숲의 풍경은 삭막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걸 잃고 빈 몸이 된 걸 보면 우리는 쉽게 '이제 저 사람 끝났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직장을 쫓겨나거나 자리를 잃는 걸 볼 때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지녔던 꽃 같고 열매 같은 걸 지키지 못하면 '헛살았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빼앗기는 걸 보면 '이제 너희 시대는 갔어' 라고 말합니다. 불명예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손가락질 받는 걸 보면 함께 욕을 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나는 겨울나무들이 이제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겨울나무들은 지금 이 순간을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계절을 살고 있으므로 꽃도 열매도 내려놓고 다만 침묵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칼바람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날도 있다고 나무들은 생각할 겁니다. 앙상한 저 나무들이 지난날 숲을 이루고 산맥의 큰 줄기를 지켜왔던 걸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꽃 같고 열매 같던 걸 지키지 못했지만 아직 끝났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네겐 더 기대할 게 없다'고 말한 사람 중에도 겨울나무처럼 견디고 있는 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작은 언덕과 같은 공동체도 그들이 물러서지 않고 거기 있었기 때문에 지킬 수 있었고, 한 시대 또한 그들로 인해 부끄럽지 않았던 걸 기억하게 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 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하였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 졸시 「겨울나무」



/도종환 시인


  1. No Image notice by 風文 2023/02/04 by 風文
    Views 6209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2. 친구야 너는 아니

  3. No Image 03Feb
    by 바람의종
    2009/02/03 by 바람의종
    Views 7042 

    출발 시간

  4. No Image 04Feb
    by 바람의종
    2009/02/04 by 바람의종
    Views 6146 

    불과 나무 - 도종환 (126)

  5. No Image 06Feb
    by 바람의종
    2009/02/06 by 바람의종
    Views 5361 

    엄마의 주름

  6. No Image 06Feb
    by 바람의종
    2009/02/06 by 바람의종
    Views 8801 

    자작나무 - 도종환 (127)

  7. No Image 08Feb
    by 바람의종
    2009/02/08 by 바람의종
    Views 5516 

    소개장

  8. No Image 09Feb
    by 바람의종
    2009/02/09 by 바람의종
    Views 4504 

    디테일을 생각하라

  9. No Image 09Feb
    by 바람의종
    2009/02/09 by 바람의종
    Views 5541 

    불타는 도시, 서울을 바라보며 - 도종환 (128)

  10. No Image 12Feb
    by 바람의종
    2009/02/12 by 바람의종
    Views 4542 

    아,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요 (129)

  11. No Image 12Feb
    by 바람의종
    2009/02/12 by 바람의종
    Views 5487 

    오늘 결정해야 할 일

  12. No Image 12Feb
    by 바람의종
    2009/02/12 by 바람의종
    Views 6781 

    천천히 걷기

  13. No Image 13Feb
    by 바람의종
    2009/02/13 by 바람의종
    Views 7370 

    천애 고아

  14. No Image 14Feb
    by 바람의종
    2009/02/14 by 바람의종
    Views 9169 

    겨울 나무 - 도종환 (130)

  15. No Image 14Feb
    by 바람의종
    2009/02/14 by 바람의종
    Views 5388 

    스트레스

  16. No Image 17Feb
    by 바람의종
    2009/02/17 by 바람의종
    Views 6582 

    상상력

  17. No Image 17Feb
    by 바람의종
    2009/02/17 by 바람의종
    Views 7655 

    흐린 하늘 흐린 세상 - 도종환 (131)

  18. No Image 18Feb
    by 바람의종
    2009/02/18 by 바람의종
    Views 5806 

    젊어지고 싶으면 사랑을 하라!

  19. No Image 18Feb
    by 바람의종
    2009/02/18 by 바람의종
    Views 6435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 도종환 (132)

  20. No Image 19Feb
    by 바람의종
    2009/02/19 by 바람의종
    Views 6160 

    이글루

  21. No Image 20Feb
    by 바람의종
    2009/02/20 by 바람의종
    Views 6686 

    악덕의 씨를 심는 교육 - 도종환 (133)

  22. No Image 21Feb
    by 바람의종
    2009/02/21 by 바람의종
    Views 6627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23.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6925 

    가난한 집 아이들

  24.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5796 

    바람 부는 날

  25.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5251 

    마음의 온도

  26.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4466 

    몸 따로 마음 따로

  27. No Image 01Mar
    by 바람의종
    2009/03/01 by 바람의종
    Views 5414 

    아빠의 포옹 그리고 스킨십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