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8019 추천 수 1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밖에 나갔다 산방으로 돌아오는 가을 오후. 나를 가장 먼저 아는 체 하는 건 쓸쓸함입니다.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고 서 있는 가을.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는 가을. 그 가을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으면 가을도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집니다.
  
  가을이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질 때마다 추녀 끝에선 풍경소리 들립니다. 그러나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는 압니다. 쓸쓸함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지 압니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 사람도 나무 한 그루도 내가 마주하고 선 고적한 시간도 늦게까지 남아 있는 풀꽃 한 송이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들인지 알게 합니다.
  
  나는 이 가을의 쓸쓸함과 만나는 시간이 좋습니다. 쓸쓸한 느낌, 쓸쓸한 맛, 쓸쓸한 풍경, 쓸쓸한 촉감이 좋습니다. 나도 쓸쓸해지고 가을도 쓸쓸해져서 가을도 나도 착해질 수밖에 없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315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2138
2744 도롱뇽의 친구들께 바람의종 2008.11.11 4654
2743 놀이 바람의종 2008.11.11 4823
2742 나는 용기를 선택하겠다 바람의종 2008.11.11 5295
2741 뚜껑을 열자! 바람의종 2008.11.11 5118
2740 친구인가, 아닌가 바람의종 2008.11.11 7509
2739 불은 나무에서 생겨 나무를 불사른다 - 도종환 (92) 바람의종 2008.11.11 5183
2738 "그래, 좋다! 밀고 나가자" 바람의종 2008.11.12 11810
2737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 도종환 (93) 바람의종 2008.11.12 7138
2736 아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바람의종 2008.11.13 5479
2735 사자새끼는 어미 물어죽일 수 있는 용기 있어야 바람의종 2008.11.13 7312
2734 기분 좋게 살아라 바람의종 2008.11.14 7158
2733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바람의종 2008.11.15 4974
» 가을 오후 - 도종환 (94) 바람의종 2008.11.15 8019
2731 멈춤의 힘 바람의종 2008.11.17 5873
2730 통곡의 집 - 도종환 (95) 바람의종 2008.11.17 7163
2729 영혼의 친구 바람의종 2008.11.18 6556
2728 뼈가 말을 하고 있다 바람의종 2008.11.19 5944
2727 깊은 가을 - 도종환 (96) 바람의종 2008.11.20 7019
2726 다리를 놓을 것인가, 벽을 쌓을 것인가 바람의종 2008.11.20 4526
2725 침묵의 예술 바람의종 2008.11.21 7077
2724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들이 너무나 많다 - 도종환 (97) 바람의종 2008.11.21 7059
2723 이해 바람의종 2008.11.22 6785
2722 상처 난 곳에 '호' 해주자 바람의종 2008.11.24 5150
2721 다음 단계로 발을 내딛는 용기 바람의종 2008.11.25 6145
2720 돈이 아까워서 하는 말 바람의종 2008.11.26 572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