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163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그대 거기 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나리꽃은 거기 있어도 여름이 오면 얼마나 아름답게 꽃핍니까. 잡풀 우거지고 보아주는 이 없어도 주홍빛 꽃 한 송이 거기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비탈지고 그늘진 그곳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먼 곳에 가 있다 해도 그대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궁벽지고 험한 그곳에 사람 사는 정겨움이 감돈다면 그대는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겨우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대견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대 거기 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낮은 곳에 있어도 구절초는 가을이 되면 얼마나 곱게 핍니까. 외진 골짜기나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어도 함께 모여 이룬 가을 풍경이 얼마나 사람들을 평화롭고 고즈넉하게 만듭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며, 언제까지 이렇게 비천한 자리에 있어야 하나 생각하지 마세요. 그대로 인하여 그대가 있는 곳이 든든한 자태로 서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찬바람 부는 낮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지 마세요. 가장 훌륭한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힘든 일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 가장 당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그대로 인하여 그대가 있는 곳이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성벽의 맨 밑에 있는 돌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성곽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세요.
외딴 늪도 자기 스스로를 깊이 사랑합니다. 그대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 속에 늪 하나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기뻐하며 목숨을 이어가는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잠자리, 나비, 반딧불이들이 기뻐하고 얼마나 많은 생명의 환호성이 늪 근처에서 울려나오는지 아십니까. 지나가던 철새들이 내려와 날개를 쉬며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아십니까.

그대 거기 있다고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마세요. 그대는 좋은 점을 참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장점을 사랑하세요. 아직도 당신이 베풀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그대가 능력이 부족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 일이 당신의 생애에 자부심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7397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6400
1077 지금 그것을 하라 바람의종 2010.07.24 6065
1076 훌륭한 아이 바람의종 2012.05.06 6071
1075 부처님 말씀 / 도종환 윤영환 2008.05.14 6072
1074 「그 모자(母子)가 사는 법」(소설가 한창훈) 바람의종 2009.05.28 6075
1073 살아있는 맛 바람의종 2012.04.27 6079
1072 "미국의 흑인으로 우뚝 서겠다" 바람의종 2011.07.27 6082
1071 꽃소식 - 도종환 (145) 바람의종 2009.03.23 6087
1070 말 한마디와 천냥 빚 바람의종 2009.05.24 6090
1069 한 발 물러서서 바람의종 2012.01.18 6090
1068 부모가 찌르는 비수 風文 2014.12.04 6094
1067 정신분석가 지망생들에게 바람의종 2011.11.18 6096
1066 후회하지마! 風文 2015.06.22 6101
1065 어머니의 한쪽 눈 바람의종 2008.02.12 6102
1064 새 - 도종환 (135) 바람의종 2009.03.01 6103
1063 더 현명한 선택 바람의종 2012.12.24 6104
1062 완전한 용서 바람의종 2011.09.24 6107
1061 그대나 나나 風文 2015.07.03 6112
1060 "당신은 나를 알아보는군요" 바람의종 2010.01.14 6116
1059 삶의 리듬 바람의종 2012.07.04 6116
1058 기뻐 할 일 - 도종환 (124) 바람의종 2009.02.02 6118
1057 생사의 기로에서 風文 2015.02.17 6121
1056 옛날의 금잔디 바람의종 2011.09.27 6127
1055 행복한 부부 바람의종 2011.07.27 6130
1054 읽기와 쓰기 風文 2014.12.07 6132
1053 좋을 때는 모른다 바람의종 2011.09.27 614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