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103 추천 수 1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꽃은 어떻게 필까요.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꽃은 고요하게 핍니다. 고요한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핍니다. 꽃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아우성치지 않으면서 핍니다. 자기 자신으로 깊어져 가며 핍니다. 자기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언 땅속에서도 깨어 움직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눈감지 않고 뜨거움 속에서도 쉬지 않습니다.

달이 소리 없이 떠올라 광활한 넓이의 어둠을 조금씩 지워나가면서도 외롭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걸 보면서, 꽃도 그 어둠 속에서 자기가 피워야 할 꽃의 자태를 배웠을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지만 집착하지 않아서 꽃 한 송이를 이루었을 겁니다. 무념무상의 그 깊은 고요 속에서 한 송이씩을 얻었을 것입니다. 자아를 향해 올곧게 나가지만 자아에 얽매이지 않고, 무아의 상태에 머무를 줄 아는 동안 한 송이씩 꽃은 피어올랐을 겁니다.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다 말고 꽃 한 송이를 보며 웃음을 짓던 가섭의 심중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꽃 한 송이가 그렇게 무장무애한 마음의 상태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 하나를 그렇게 깨닫고 삶의 경계 경계에서마다 화두 하나씩 깨쳐 나가야 한다는 걸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진흙 속에 살고 진흙에서 출발 하되 진흙이 묻어 있지 않는 새로운 탄생. 우리의 삶도 그런 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풀 한 포기도 그와 똑같이 피어납니다. 그렇게 제 빛깔을 찾아 갑니다. 나무 한 그루도 그렇게 나뭇잎을 내밉니다. 가장 추운 바람과 싸우는 나무의 맨 바깥쪽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되 욕심 부리지 않고, 욕심조차 버리고 나아가다 제 몸 곳곳에서 꽃눈 트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 잎새를 가지 끝에 내밀며 비로소 겨울을 봄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입니다.

봄도 그렇게 옵니다. 아주 작은 냉이꽃 한 송이나 꽃다지 한 포기도 그렇게 추위와 어둠 속에 그 추위와 어둠이 화두가 되어 제 빛깔의 꽃을 얻습니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혹독한 제 운명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발견하였을 때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말합니다. 발치 끝에 와 발목을 간지르는 어린 풀들을 보며 신호라도 하듯 푸른 잎을 내미는 나무들. 사람들은 그걸 보고 비로소 봄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 나뭇가지 위로 떠났던 새들이 돌아오는 반가운 목소리가 모여 와 쌓일 때 비로소 봄이라고 말합니다.

추상명사인 봄은 풀과 나무와 꽃과 새라는 구체적인 생명들로 채워졌을 때 추상이라는 딱지를 떼고 우리의 살갗으로 따스하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2010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1434
1106 둘이서 함께 가면 風文 2015.02.09 6058
1105 "미국의 흑인으로 우뚝 서겠다" 바람의종 2009.11.12 6061
1104 빈 병 가득했던 시절 바람의종 2008.06.27 6062
1103 아홉 가지 덕 - 도종환 (88) 바람의종 2008.10.31 6062
1102 뼈가 말을 하고 있다 바람의종 2008.11.19 6064
1101 펑펑 울고 싶은가 風文 2015.02.10 6067
1100 역사적 순간 바람의종 2009.05.24 6073
1099 지금 하라 風文 2015.04.28 6079
1098 인연 風文 2015.04.27 6080
1097 '천국 귀' 바람의종 2012.05.03 6081
1096 아남 카라 바람의종 2008.12.30 6089
1095 살아있는 맛 바람의종 2012.04.27 6095
1094 훌륭한 아이 바람의종 2012.05.06 6101
» 꽃은 소리 없이 핍니다 - 도종환 (143) 바람의종 2009.03.16 6103
1092 사랑도 뻔한 게 좋다 바람의종 2008.10.30 6104
1091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시인 정끝별) 바람의종 2009.06.09 6106
1090 또 기다리는 편지 風文 2014.12.24 6106
1089 지금 그것을 하라 바람의종 2010.07.24 6107
1088 긴 것, 짧은 것 風文 2015.06.22 6108
1087 더 현명한 선택 바람의종 2012.12.24 6109
1086 고통의 기록 風文 2016.09.04 6112
1085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학교 바람의종 2008.04.11 6113
1084 재능만 믿지 말고... 風文 2015.02.15 6118
1083 한 발 물러서서 바람의종 2012.01.18 6119
1082 삶의 리듬 바람의종 2012.07.04 612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