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9 13:29
모과꽃 - 도종환 (148 - 끝.)
조회 수 6684 추천 수 20 댓글 0
봄비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 몰려온 날도 있었으며, 며칠씩 흐린 날이 이어지기도 했고, 엊그제는 산 너머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힘든 밤에도 나는 그저 꽃이 늘 피어 아름답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와 바람 황사와 추위 속에서 언제나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꽃을 지키고 그 꽃을 푸른 잎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보아주는 이가 있건 없건 꽃은 저 혼자 곱게 피었다 소리 없이 돌아갑니다.
뒤뜰에 백목련 피었다 지는 시간에 창가에 모과나무 꽃순이 파란 손을 펼치며 앙증맞게 자라 오르고 있습니다. 모과꽃도 눈에 뜨일 듯 말듯 그러게 피어날 겁니다. 향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다가 갈 겁니다. 저도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저도 "눈에 뜨일 듯 말 듯"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드러내고자 / 애쓰는 꽃 아니라 /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숲의 모든 나무가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봄이면 이렇게 조촐한 꽃 하나 피워놓고 있다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소월이 「산유화」에서 이야기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싶습니다.
지난 일 년 간 이삼일에 한 통씩 여러분들께 엽서를 보냈습니다. 엽서를 여기까지 쓰고 저도 잠시 쉬겠습니다. 지는 꽃잎과 함께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있을까 합니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 風文 | 2023.02.04 | 6641 |
공지 | 친구야 너는 아니 1 | 風文 | 2015.08.20 | 95723 |
2602 | 파도치는 삶이 아름답다 | 風文 | 2023.10.13 | 543 |
2601 | 나는 나다 | 風文 | 2020.05.02 | 544 |
2600 |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다 | 風文 | 2021.11.10 | 544 |
2599 | 공포와 맞서 요청한 남자 - 마크 빅터 한센 | 風文 | 2022.09.01 | 544 |
2598 | 얼어붙은 바다를 쪼개는 도끼처럼 | 風文 | 2023.09.21 | 544 |
2597 | 정상에 오른 사람 | 風文 | 2019.08.16 | 545 |
2596 | 단도적입적인 접근이 일궈낸 사랑 | 風文 | 2022.08.21 | 545 |
2595 | 산과 신 | 風文 | 2019.08.28 | 546 |
2594 | '자발적인 노예' | 風文 | 2019.08.15 | 547 |
2593 | 살아야 할 이유 | 風文 | 2023.02.08 | 547 |
2592 | 서른 살부터 마흔 살까지 | 風文 | 2019.08.12 | 548 |
2591 |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 風文 | 2022.05.18 | 548 |
2590 |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 風文 | 2023.08.02 | 548 |
2589 | 너무 오랜 시간 | 風文 | 2019.08.13 | 549 |
2588 | 2. 세이렌 | 風文 | 2023.06.16 | 549 |
2587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7.3. 뮤즈 | 風文 | 2023.11.20 | 549 |
2586 | 극복할 수 있다! | 風文 | 2020.05.05 | 550 |
2585 | 사랑을 잃고 나서... | 風文 | 2022.01.13 | 550 |
2584 | 세상 모두가 두려워한다, 마틴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라 | 風文 | 2022.09.11 | 550 |
2583 | 나무도 체조를 한다 | 風文 | 2022.06.04 | 552 |
2582 | 화가 날 때는 | 風文 | 2022.12.08 | 552 |
2581 | 재능만 믿지 말고... | 風文 | 2023.05.30 | 552 |
2580 | 제 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 風文 | 2023.06.14 | 552 |
2579 | 24시간 스트레스 | 風文 | 2023.08.05 | 553 |
2578 | 마음의 감옥 | 風文 | 2019.08.14 | 5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