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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신라 경덕왕 때 이순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는데 갑자기 세속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왕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고 단속사(斷俗寺)란 절을 지어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왕이 음악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문에 나아가 간언을 올립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음탕하고 안락하여 그칠 줄 모르다가 마침내 정사가 문란하고 국가가 패망하였다 하오.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엎디어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하시어 나라의 수명을 영구케 하옵소서."
  
  불러도 나오지 않던 신하가 직접 찾아와 이렇게 간언하는 소리를 듣고 왕은 감탄합니다. 음악을 멈추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도와 진리와 이세지방(理世之方), 즉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듣습니다.
  
  벼슬자리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한 번 자리에서 물러나면 왕이 아무리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가, 왕이 정사를 조금이라도 게을리 합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걸음에 달려가 개과자신(改過自新) 하기를 직간 하는 태도는 얼마나 늠름합니까.
  
  또한 이런 신하의 말을 듣고 감탄하는 왕도 훌륭합니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이 감탄(感歎)이라는 한자를 바라보며 나는 묘한 감동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게 아니냐?" 이렇게 대놓고 자기의 잘못을 질책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감탄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경덕왕 15년에도 이 비슷한 기록이 나옵니다. 상대등 김사인이 나라에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남을 들어 글월을 올려 시정의 득실을 호되게 따지니 왕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천재지변이나 재앙이야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데도 그걸 계기로 왕이 하고 있는 정치의 잘잘못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 정사를 돌아보게 하는 신하나 그것을 가납(嘉納), 기쁘게 받아들이는 왕이나 다 열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국문학에서 경덕왕은 오히려 충담사라는 스님 때문에 잠깐 이름이 나오는 왕 정도로만 기억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 누상에 나아가 "누가 능력 있는 스님 한 분을 데려 올 수 있겠소." 하고 말합니다. 때마침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는 큰스님을 데리고 오자 왕은 "내가 말하는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칩니다.
  
  다시 납의(衲衣)를 걸치고 앵두나무통과 삼태기를 걸머진 스님 한 분이 왔는데 왕이 누구냐고 물으니 충담이라고 대답합니다.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드리고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왕은 그가 「찬기파랑가」라는 사뇌가를 지은 사람이냐고 묻고는 자기를 위하여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달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충담스님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할지면 /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안민가」를 짓습니다.
  
  이 향가를 보고 왕은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합니다. 왕사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권력과 존경이 뒤따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충담스님은 두 번 절하고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납니다. 자기에게 올바른 소리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꾸준히 찾고 있는 왕도 훌륭한 왕이지만, 권력에 연연해하지 않고 낡은 옷에 삼태기를 걸치고 표표히 일어설 줄 아는 사람도 장부다운 사람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주위에 많은 왕은 복 받은 왕입니다.
  
  권력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랫사람의 올바른 소리를 귀에 거슬려 하고, 아랫사람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눈치만 보고, 권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나를 언제 불러줄 것인가 노심초사하다 부르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단걸음에 달려가고, 자리에 앉으면 자리를 비우고 쏘다니는 날이 대부분인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세월이 흐른다고 세상이 나아지는 게 아님을 알게 됩니다.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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