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455 추천 수 1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가을 오후 상당산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단풍이 참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가는 길을 지나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황홀하였습니다. 나는 길가에 줄 지어 선 은행나무 사이를 지나오며 나무들에게 거수경례 하였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은행나무는 순간순간 제 삶에 충실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목마른 날들도 많았고, 하염없이 빗줄기에 젖어야 하는 날도 있었으며, 뜨거운 햇살에 몸이 바짝바짝 타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햇살에도 정직하였고 목마름에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시달릴 때는 시달리는 대로 바람을 받아들였고, 구름 그림자에 그늘진 날은 그늘 속에서 담담하였습니다.
  
  제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란 황금빛 잎들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은행나무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황홀의 편린들을 하나씩 떼어 바람에 주며 은행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이 한 해의 절정임을 은행나무도 알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도 보고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한 해에 한 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남아 있는 우리 생의 어느 날이 이렇게 찬란한 소멸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충실하고 정직하였던 삶이 황홀하게 단풍지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도종환/시인

  1.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Date2023.02.04 By風文 Views2618
    read more
  2. 친구야 너는 아니

    Date2015.08.20 By風文 Views91493
    read more
  3. 청소

    Date2008.11.03 By바람의종 Views7354
    Read More
  4. 세상사

    Date2008.11.01 By바람의종 Views5845
    Read More
  5. 아홉 가지 덕 - 도종환 (88)

    Date2008.10.31 By바람의종 Views5810
    Read More
  6. 백만장자로 태어나 거지로 죽다

    Date2008.10.31 By바람의종 Views7293
    Read More
  7.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87)

    Date2008.10.30 By바람의종 Views10116
    Read More
  8. 사랑도 뻔한 게 좋다

    Date2008.10.30 By바람의종 Views5919
    Read More
  9. 김성희의 페이지 - 가을가뭄

    Date2008.10.30 By바람의종 Views8300
    Read More
  10.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Date2008.10.29 By바람의종 Views6455
    Read More
  11.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Date2008.10.29 By바람의종 Views5931
    Read More
  12. 혼자라고 느낄 때

    Date2008.10.29 By바람의종 Views7567
    Read More
  13.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

    Date2008.10.27 By바람의종 Views8112
    Read More
  14. 멈출 수 없는 이유

    Date2008.10.25 By바람의종 Views7535
    Read More
  15. 벌레 먹은 나뭇잎 - 도종환 (85)

    Date2008.10.25 By바람의종 Views8131
    Read More
  16. 깊이 바라보기

    Date2008.10.24 By바람의종 Views5788
    Read More
  17.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Date2008.10.23 By바람의종 Views7791
    Read More
  18. 눈물 속에 잠이 들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Date2008.10.23 By바람의종 Views6989
    Read More
  19. 아무도 가지 않은 길

    Date2008.10.22 By바람의종 Views5823
    Read More
  20. 좋은 생각, 나쁜 생각

    Date2008.10.22 By바람의종 Views8661
    Read More
  21. 아,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 - 도종환 (84)

    Date2008.10.22 By바람의종 Views5051
    Read More
  22. 행복의 양(量)

    Date2008.10.20 By바람의종 Views6375
    Read More
  23. 그대 이제 꿈을 말할 때가 아닌가

    Date2008.10.20 By바람의종 Views5877
    Read More
  24. 참 좋은 글 - 도종환 (83)

    Date2008.10.20 By바람의종 Views6432
    Read More
  25. 단풍 - 도종환 (82)

    Date2008.10.17 By바람의종 Views9169
    Read More
  26. 고적한 날 - 도종환 (81)

    Date2008.10.17 By바람의종 Views6932
    Read More
  27. 전혀 다른 세계

    Date2008.10.17 By바람의종 Views7933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 121 Next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