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1106 추천 수 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김수영 「구슬픈 肉體」 중에서)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나 본 적이 있으신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 현실화되지 못할 때 좌절감이 생기고 사무침이 생깁니다.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 사무침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어둠 속에서 천장 모서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좌절한 자아, 사무침이 일상화된 자아가 보이지요.
아름답고 화려한 나의 꿈,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꿈. 잠이 들락 말락 할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게 이런 생각들이지요. 그리하여 벌떡 일어나 불을 켜면 상상한 것들, 어른거린 것들은 찰나에 없어져 버립니다. 불을 켠 순간은 허상을 벗어나 이성을 되찾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불이 켜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존재이며 쉴 새 없이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시에는 이렇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괴리감,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비애감이 묻어있습니다. 매 순간 현실을 살아 내야 하는 긴장감과 비장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화자 뿐 아니라 누구든 마주쳐야만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비록 어둠 속에서 없어져 버린 부박하고 허황된 꿈일지라도 그런 ‘꿈’이 있기에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이상이 없이 살아가는 현실은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려 발버둥치는 것이 현실이며, 이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은 좀 더 꿈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끝없는 인내와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7975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7086
2927 현대예술의 엔트로피 바람의종 2008.04.09 18570
2926 화개 벚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09 8348
2925 4월 이야기 바람의종 2008.04.10 9848
2924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 납니다 바람의종 2008.04.11 6685
2923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학교 바람의종 2008.04.11 6003
2922 소를 보았다 바람의종 2008.04.11 9361
2921 네비게이션에 없는 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4 6980
2920 행복한 미래로 가는 오래된 네 가지 철학 바람의종 2008.04.16 8070
2919 행운에 짓밟히는 행복 바람의종 2008.04.16 8207
2918 자족에 이르는 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6 6731
2917 아배 생각 - 안상학 바람의종 2008.04.17 6526
2916 산벚나무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8 12983
2915 용연향과 사람의 향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1 9285
2914 행복한 농사꾼을 바라보며 바람의종 2008.04.22 8518
2913 교환의 비밀: 가난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바람의종 2008.04.22 6583
2912 섬기고 공경할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4 6921
2911 입을 여는 나무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5 7183
2910 마음으로 소통하라 바람의종 2008.04.25 5656
2909 참는다는 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28 8438
2908 시간은 반드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바람의종 2008.04.29 7615
2907 하나의 가치 바람의종 2008.04.29 6829
2906 만족과 불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30 5357
2905 젖은 꽃잎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02 9531
2904 어린이라는 패러다임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05 6384
2903 원초적인 생명의 제스처, 문학 바람의종 2008.05.06 879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