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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zisis.com/601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성주의에 대하여


서론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문화국이라고 자처하는 나라들은 무자비한 살육과 파괴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로 인한 이전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거부반응은 문학과 미술의 새로운 사조로서 등장하게 되고 여기서 다다이즘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아 단순한 기하형태와 공업재료로 이루어진 조각의 한 경향으로 구성주의가 생겨난다. 이 두 가지 사조의 개략적인 이해와 대표적인 작가의 작품 이해를 이 리포트의 목표로 잡았다.



개요


1. 다다이즘과 구성주의의 배경


(1)다다이즘의 시대적 배경 : 다다이즘은 명백히 말해 20세기와 전후사회라는 특유한 정신적 상황에서 발생된 문화 예술 운동이었다. 산업혁명이후 급속히 변화한 물질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합리적이라 여겨졌던 문명이 1차 대전을 야기하게 되자 물질 문명의 결과로서 노출된 인간이 예술이라는 제도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발생한 일종의 부정적 입장으로서의 이성과 합리에 대한 반대적 태도로서 탄생한 것이 다다이즘인 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다다이즘'은 양식이라기 보다도 일종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술 한 부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문학과 음악 등의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동시에 시작되며 모든 예술장르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2)구성주의의 시대적 배경 : 전쟁이 끝난 1917년 혁명의 격변이 가져온 문제점들에 민란과 외세의 침략까지 겹치게 된 러시아에는 실제적인 현실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의 직업이 가진 사회적 유용성을 인식하고 과시할 필요성이 특히 요구되던 당시에 전위적 미술가들은 돌연 미술과 디자인을 위한 국가기구에 있어서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에 대한 요구의 해답으로 제시된 방법 중 하나가 미술 자체를 재인식하고 재정립하여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기호로 보편적인 진리들을 재현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젊은 화가였던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은 1913년에 파리의 피카소를 방문하였다. 피카소가 타틀린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2-14년 사이에 피카소는 구축된 조각(constructed sculptures)을 몇 개 만들었다.


그 중 몇 개는 장난 삼아 만든 것이었지만 그 외의 작품들은 종합적이고 구축적인 입체주의 그림을 그릴 때와 같이 다양한 재료를 보다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러시아의 구축주의(Russian Constructivism)의 역사는 이와는 전혀 다르며 그 이념에 있어서도 피카소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단지 피카소의 작품은 발단적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2. 다다와 구성주의의 용어적 의미


다다이즘 : 20C 유럽 문학이나 미술운동의 하나. '다다'란 아무런 뜻이 없다는 말로, '다다'의 주장은 문학, 미술에 있어 전통 어법등 일체 제약을 벗어나 개인을 도그마 형식,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무방향의 운동으로 나타남. 극단적 반이성주의로 당시의 사회 불안을 반영한 듯 하였음. -삼성문화사.


국어 대사전-


다다라는 용어를 누가 처음 사용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주장하고 있어 누구라고 명확하게 가려내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탄생된 장소는 반박의 여지없이 취리히이다. 1차대전이 한창일 때 이 도시에는 몇몇 독일인들이 피신해 있었고 그 중에는 시인 휴고발과 그의 애인 에미 헤닝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1916년 2월 5일 카바레 볼테르라고 하는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카바레를 열었다. 며칠 후 휴고 발과 그의 동향인 리하르트 휄젠벡, 루마니아에서 이민 온 트리스탕 짜라와 마르셀 얀코, 알자스인인 쟝 아르프등이 모여 다다를 탄생시켰다. 다다라는 단어는 휴고 발이 <카바레 볼테르>라는 제목으로 취리히에서 발간하던 "문학 및 예술에 관한 글 모음"에 1916년 5월 처음으로 인쇄되어 발표되었다. 역시 1916년에는 트리스탕 짜라의 <안티피린씨의 최초의 천상 여행>과 쟝 아르프가 삽화를 그린 휄젠벡의 <환상적인 기도> 등 두 권의 책을 펴냄으로써 다다 총서도 시작되었다. 이어서 1917년 3월에는 다다 화랑이 취리히에 문을 열었다.


다다는 전통에 반대하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며, 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 기본적 원칙은 부정이다. 다다운동은 1919년 취리히에 머물렀던 프항시스 피카비아에 의해 미술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마르셀 뒤샹의 성상 파괴적인 예술관도 다다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쟁을 통해서 젊은 미술가들과 시인들은 새로운 근거를 모색하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다다를 사회를 위한 진혼곡으로 이해했으며 새로운 사회의 원초적 출발로 보았다. 예술가로서 다다이스트는 당연히 파멸해가는 사회에 속한 자신들의 모습에서 그 예술의 파괴를 시도한다. 복잡한 아이러니 속에 그들은 사회와 예술의 파괴는 곧 미술가인 자신들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다다는 어느 의미로서 그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기 파괴적인 몸짓은 결국 새로운 예술의 부활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파괴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다시 출발하고 싶어했다. 어린아이가 최초로 한다는 다다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 것은 이러한 의미로써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죽었다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던 그들의 예술의 파괴에 대한 시도는 곧 허무주의로 연결된다.


그들에게는 일관된 양식이나 합일점이 없었고, 상이한 지역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다다의 몸짓들에서 우리는 공격성과 허무감 그리고 비관을 느낄 수가 있다. 다다이즘은 파괴 속에서 원시주의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것의 파괴는 원점 즉 원시를 의미한다. 그들은 이 원시를 보여주어 참다운 새 출발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이 "無에의 정신"은 다다이스트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원시 부족예술에 눈을 돌리게 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와서는 다다의 예술 부정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하의 세계 즉 잠재적 무의식의 세계를 비합리적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것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원시인들의 2원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한다.


다다의 메시지는 유럽적 가치관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용인된 모든 취미와 이성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런 다다의 성격과 더불어 새로운 현상이 도래하게 되었다. 생은 소음, 색채, 정신적인 리듬이 다다예술에 그대로 수용되어 거리낌없는 일상적인 정신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감각적인 아우성과 열병 그리고 모든 잔인한 현실과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의 정신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요구의 확산이며 주위 현실과의 가장 원초적인 관계를 상징한다.


인간존재의 모든 가치가 발휘되고 또 각개 사물의 다각적 면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각각의 사물, 생각이 전도되고 교체되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강렬한 물결을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다였다.



구성주의


1917년 러시아에서는 공산정권인 볼셰비키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가 통치체재로서 사회주의를 공표 하였다.


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풍조가 일어났다. 그리고 예술계도 예외


없이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추종하는 전위작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난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부르조아 계층에 반대하는


혁명파에 적극 가담하여 레닌의 사회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그림, 조각, 벽보들을 열성적으로 제작하게 된다.


그들은 예술의 개혁이 사회의 개혁과 병행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보다 많은 인민을 위한 실용예술로서 기능적인 복장, 가구들을 고안했으며, 산업계 노동자들과 연계하여 연합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프랑스의 입체주의의 영향하에서 전통적인 재현의 수법을 거부하고 순수한 조형수단으로서 기하학적 추상을 미술의 형태로 내세웠다.


이들이 기하형태를 주된 표현양식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기하추상이 합리적 질서의 표상이자 이상적 사회를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과학과 인민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이념이 상충될 수 있는 세계, 즉 이상세계인 유토피아를 나타내는 방법은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성이나 대상모방성을 배제한 단순하고도 실용적인 외형을 갖춘 것이어야 했다. 또한 기하추상 형태가 보편적 통용성과 간결한 내용으로 효과적인 이념전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며, 대량 생산체재에 기능적으로 적용하기에 모양이 용이해지기 때문이었다.



3. 다다와 구성주의 작가와 작품소개


다다이즘의 대표적 작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뒤샹은 지칠 줄 모르는 실험적인 화가로서.1912년까지 시적이고 역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표현방법을 확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1913년에 그는 각기 1미터 길이로 된 세 가닥의 바느질 실을 1미터 높이에서 화폭 위에 떨어뜨려서 나타나는 불규칙적이고 우연한 형태를 그대로 고정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그는 이를 [세개의 표준 정지장치]라고 명명하였다. 1914년에 뒤샹은 오래된 캔버스를 사용하여 그이 [표준 정지장치의 회로]를 제작하였다. 그 캔버스에는 미완성의 구상회화의 흔적과 그이 주요작품인 [큰 유리]그림의 초기 습작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은 마치 철도지도와 같은 것으로서 각 표준 정지장치들을 세 번씩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원근법적인 투시법으로 그려진 이 지도는 후에 [큰유리]그림의 아홉 개의 능금산 주형들(Nine Malic Moulds)에서 각 인물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작가의 통제력은 보다 완벽하게 배제될 수도 있다. 뒤샹은 1914년에 기존의 사물들을 예술로서 간주하는 미술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15년 뉴욕에서는 눈삽을 사서 거기에 [부러진 팔 앞에서]라는 제명을 붙였다. 또한 1917년에는 뉴욕에서 남자의 소변기('Mott'회사 제품)에 'R.Mutt'라는 서명을 하여 전시회에 보냈다. 소변기에 새롭게 명명된 [샘]이라는 명칭과 그것이 놓인 위치는 그 사물의 원래 기능을 전도시킨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의 작품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 발가벗겨진 신부,조차도(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라는 작품은 간단히 [큰 유리(Large Glass)]라고도 불린다. 이 작품은 열렬한 예술애호가가 바랄 수 있는 모든 정성과 기술을 동원하여 설계되고 제작되었다. 그림을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뒤샹은 캔버스 대신 유리를 사용하였다. 그는 두 개의 불침투성의 투명유리판 사이에 물감 칠한 부분을 봉합시켜서 그림의 영속성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구성주의의 대표적 작가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


블라디미르 타틀린(1895-1956)은 러시아 구성주의가 탄생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작가이다. 1913년에 그는 베를린과 파리를 여행하게 되는데, 파리에서 피카소 화실을 찾게 된 그는 입체주의 작품들을 보고 새로운 조형예술에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피카소가 조각에서의 콜라주가 지니는 의미를 연구하고 있었던 구조물들을 본 타틀린은 자신의 이후의 작품들을 구성하는 데 피카소의 실험작품들을 참고하게 된다.


러시아로 돌아 온 그가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1914-1917년경 작품인[부조]에서 볼 있는 석고, 판유리, 유리 조각으로 화면을 덮고 나무, 금속, 판자로 구성한 부조 시리즈였다. 이것은 구조물이든 주조물이든 간에 조각사상 첫 번째의 완전한 추상물로서 일컬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충실한 추종자였던 타틀린은 러시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기계와 건축에 대한 본래의 관심을 당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축물로서 제작해 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야심은 1920년경에 완성한 [제 3 인터내셔널 기념탑]의 모형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축소모형으로서, 이 작품이 애초에 의도한 대로 지어졌다면 높이 396m에 이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놓은 조각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 건축물은 원통과 입방체, 원추형 유리로 감싸 인 일정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나선형 금속 구조물로 설계되었다. 수많은 유리로 겉면이 둘러싸인 부분들은 회합을 위한 장소를 제공함으로서, 일년에 한번, 한 달에 한번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완전한 변화를 보이면서 회전하도록 구상되었다.


그는 이후 사회주의 정부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공리주의적 예술을 실현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 타틀린과 로드첸고를 중심으로 하는 순수한 예술운동으로서 구성주의는 1920년에 그 막을 내리게 되지만 이후 다른 예술가들 과는 다르게 러시아에 남아 계속 작업을 하던 그들은 무대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



4. 현대미술에의 영향


다다이즘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프랑스에서보다도 독일에서는 정치적 대립이나 다른 기법의 도입등으로 다다운동이 성행했다. 쾰른에서는 막스 에른스트의 활동이나 요하네스 바아르겔트의 잡지 <데어 반티라토르>를 중심으로 발표되던 콜라쥬나, 존 허트필드, 라울 하우스만의 사진몽타쥬 등이 이 시기에 창조된 새로운 다다의 미술 기법들이다. 다다운동은 1923년경에 그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마르셀 뒤샹의 영향을 통해 미국과 독일에서 새로운 형태의 다다운동이 생겨난다. 팝 아트, 플락서스 운동, 해프닝,반예술운동 등은 다다이스트적인 도발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다다는 미학적 ,윤리적 ,사회적, 도덕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이로 인한 반예술의 시도는 기존적인 재료나 형식에 얽매임 없이 조형적인 면에 오브제의 발견과 전개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룬다.


대분분의 다다작가에 의한 오브제는 물질자체의 구성과 이로 인한 물질의 일상적 효용성을 제거하여 무의미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후의 모든 전위적 예술사조에 깊게 침투되어 20세기 미술 전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된다.



러시아의 구성주의가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구성주의는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 기하추상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체제가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일에만 집중하게 되고, 레닌 당국이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일일이 간섭, 제작품의 성격까지 제약하는 등, 일종의 미술규격화를 시도하면서 추상미술과 같은 실험적인 것에는 등한시하게 됨에 따라 구성주의 작가들은 그 자유로운 예술활동에 한계를 느낀다.


결국, 이들은 서구 유럽으로 하나 둘씩 망명하기에 이른다.


구성주의가 러시아에서 그 나름대로 중요성을 띠고 등장하고 형성되었지만 막상 그 개념의 확장은 망명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서구 유럽에서 더욱 활발히 진행된다. 나움 가보나 안톤 페브너스와 같은 형제들은 그들의 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서구유럽에 전개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들은 예술과 건축의 새로운 국제적 양식을 창조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론


세게 대전 후라는 동일한 시간선상에서 다다이즘과 구성주의 기계문명에 대한 상이한 이해로 출발한 미술사조였다. 한편은 기계문명으로 야기된 전쟁에 대한 회의와 그로 인한 부정과 파괴의 개념으로서의 운동으로, 다른 한편은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전달과 기계미학의 효율성에 대한 예술적 반영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비록 다다이즘은 출발자체가 파괴에 의한 기본 개념의 탈피였기에, 같은 동기로 다다이즘 자체의 개념 역시 오래 존속할 수는 없었지만, 이 운동이 20세기 후반의 미술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전까지 내려오던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 주체가 관람객에서 예술가라고 불리는 행위자에게로 옳겨졌다는 것과 자유로운 형식에서 비롯된 다양한 개념의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반대로 구성주의는 출발이 사회적인 요구의 예술적 수용이었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그 흐름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표현 과정에 있어서의 합리성과 새로운 시도는 그 후 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고 확장되었다.


우리가 예술의 사조를 바라볼 때 단순히 표현방식이나 목적에 치중해서 분석하는 경향이 있음을 감안할 때 이 두 사조의 비교를 통해서, 표현형식의 유행도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적 요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사조 속에서 자기의 예술행위에 최선을 다한 진지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노력과 정열을 엿볼 수 있었다.y



참고서적 : 20세기의 미술(The Story Of Modern Art). 노버트 린튼. 예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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