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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1 - 손때의 의미

  필자에게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만년필을 들 수 있겠다.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잘 모른다. 허리부분에 금이 가 테이프로 감아 놓은 이 고물 만년필은 20여 년 전에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그동안 수차례 잃어버린 적도 있으나 용케도 되돌아온, 그래서 나와는 전생에 무슨 연이라도 있는 듯한 물건이다. 만신창이가 된 이 만년필은 그동안 박사학위 논문과 네 권의 저서를 비롯하여 여러 잡문을 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이 만년필이 아니고는 어떤 글도 쓸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완전히 망가져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해도 이름 그대로 만년까지 간직할 참이다. 내가 아끼는 것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만년필도 있다. 필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가 만년까지 아껴야 할 정신적인 유산, 바로 우리말, 우리글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우리말, 우리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오다 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이처럼 소중한 재산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년필에 나의 손때가 묻어 있기에 소중한 것처럼 말이나 글에는 우리 민족의 손때, 곧 생각이나 정서, 얼이나 정신이 응고되어 있기에 영원토록 간직하고 다듬어야 할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외국어, 외래어의 홍수속에서 우리말을 천시하는 풍조하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항이다.

  우리말에는 한가지 뜻의 말이라 해도 고유어와 한자어, 서구계 외래어 사이에 위상의 대립이 있다. 말하자면 토박이 고유어보다는 한자말이 더 점잖고 고상하며, 한자말보다는 외래어가 더 참신하고 유식해 보인다는 그런 인식 말이다. 과연 그럴까. 흔한 예로 호텔이나 고급식당에서 우유 한잔을 시켰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 밀크 한잔 주세요."라거나  "여기 우유 한잔  주세요"는 그런대로 무난한 주문이다. 그런데 "여기 쇠젖 한잔 주세요"라고 했다면 어떨까? 웬 이런 무식한 촌놈이 있느냐는 듯이 종업원의 표정이 달라질 것이다. 고급일수록, 배운 사람일수록, 점잖은 자리일수록 고유어나 한자어보다는 서구계 외래어를 써야 격에 맞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계화"의 추세 속에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마당에 이런 생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천년 동안 써 온, 조상의 손때가 묻은 우리말은 어떻게 되는가? 온 세상이 하나의 마을(지구촌)이 되었다 하여 영어 하나로 온 세계인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어떤말이든 자국어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외국어인 영어를 잘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말에 능숙해야만 다른 외국어도 잘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도 이제 인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잘못된 고정 관념을 버린다면 토박이 고유어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자가용 운전자를 "오너드라이버"라 하는데, 이보다는 "자가운전"이, 자가운전보다는 "손수운전"이나 "몸소운전"이 더 곱고도 정겨운 말로 인식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기로 한다. "도투락"이라는 식품명을 본 일이 있다. 도투락은 도투락댕기의 준말로 행운을 상징하는 돼지꼬리를 지칭하는 옛말이다. 옛날 여자 어린이가 명절에 머리 끝에 드리는 댕기를 가리키는 말을 식품 이름에 끌어다 쓴 점에 호감이 간다. 가죽신을 지었던 이들을 "갖바치"라 불렀는데 이 말을 피혁 제품의 상표로 끌어다 쓴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단 상품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식당에서 여럿이 식사하고 다같이 추렴하여 요금을 내는 방식을 "도리기" 또는 "도르리"라고 한다. 이런 좋은 우리말을 두고 "더치페이"라는 어려운 외국어를 써서 우리와는 아무 유감이 없는 화란 사람들을 나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상 용어에서도 나들이 옷을 "난벌",  평상복을 "든벌", 이 두가지를 겸하는 옷을 "난든벌"이라 하고 소매가 없는 옷을 "민소매"라 한다. 이런 좋은 우리 말을 두고 굳이 캐주얼이니 소대나시니 하는 외국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흔히 사투리라고 하는 방언도 꼭 버릴 것만은 아니다. 경상도 말에서 "새첩다"는 참으로 새첩은 말이며, "하머"는 정말 정감 어린 표현이다. "술 한잔 살 거야?" "하머" 두말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멋진 답변이다. "욕봤다"는 치욕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이며, "야 이 문둥아!" 라는 호칭은 실제 나병환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경상도 문둥이들은 잘 알고 있다. 흔히 하는 말에 "때 빼고 광낸다"는 속언이 있다. 구두에서는 때를 빼고 광을 낼 수 있으므로 이 말은 서양인들에게나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짚새기나 고무신에서는 때는 빼도 광은 낼 수가 없다. 때는 세월이요, 전통의 이끼라 할 수 있으나, 이럴 경우 오히려 광을 빼고 때를 묻히는 편이 효과적일 터이다.

  손때는 우리의 체온이자 기억의 언어이며 세월과 정이 괴어  있는 늪이다. 조강지처는 그런 때(정)이 묻어 있기에 결코 버리지 못한다. 오래 간직한 지갑이나 만년필을 잃어버렸을 때 그 속에 든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겉에 묻은 손 때가 아까워서 우리는 아쉬워한다. 이런 대화는 어떨까? "어때, 우리말이 더 새첩고 좋제?" "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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