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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영암과 월출산 - 달래골에서 만나는 두 성인


  옛날 성년에 가까운 오누이가 여름날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흠뻑  비에 젖고 말았다. 물에 젖은 얇은 옷 속으로 내비치는 누이의 속살을 본 오라비는 순간적으로 강한 성욕을 느껴 상대가 혈육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것도 한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온 오라비는 참담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잠시 자리를 피한 그는 잔뜩 발기한 자신의  남성을 꺼내 돌로 짓이기며 괴로워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누이가 바위 뒤에 숨은 오라비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가고 있었다. 모든 사정을 안 누이는 오라비의 시신을 끌어안고 이렇게 절규한다. "그렇다면 한번쯤 말이나 해 보지. 차라리 달래나 보지..."  그 사건이 있은 뒤 누이의 "달래나 보지"라는 말이 빌미가 되어  이 고개를 "달래네" 또는 "달래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니 참 엉터리 같은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근친상간의 성적 충동을 부끄러워하는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다는 이야기는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매우 흔한 지명전설이다. 자살한 곳이 고개가 아닐 수도 있다. 충주의 달래강 전설처럼 강가일수도 있고 숲 속이나 동굴 속일수도 있다. 등장 인물도 오누이가 아닌 누나와 남동생 또는 아저씨와 조카 사이일 수도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그러나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이런 이야기는 전국 30여곳의 지명 속에 묻혀 전해지고 있다.

  옛말에 "달"은 산과 동의어로서 달내, 달랫골이라 하면 산골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달래나 보지"라는 말에서 "달래"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은 한낱 흥미 위주로 지어낸,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달"을 표기하기 위해 월과 과 같은 한자가 동원되었다. 진안이나 섬진강의 본이름과 마찬가지로 영암에 있는 월출산도 본래 달나뫼 또는 달래뫼로 호칭되었다. 영암도 달래골이라 불리던 곳으로, 이 달래란 고유어를 백제 때는 월계라 적었고 고려 때는 월출이라 적었다. 월은 "달"의 차훈 표기이다. 영암땅에는 월출산 외에도 월평, 월곡, 월산, 월봉, 월천, 매월 등의 월자계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달내라는 고유 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어려운 한자 이름인 영암으로 개칭된다. 영암은 말 그대로 신령스러운 바위라는 뜻인데, 일설에 따르면 월출산 구정봉 밑에 움직이는 바위가 있어 한 사람이 밀거나 열 사람이 밀거나 똑같이 흔들린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흔들바위는 월출산에만 있는 특별한 명물이 아니다. 영암은 이 산에 있는 한두개의 특정한 바위만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넓은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신령스러운 바위 덩어리 전체를 일컬어 영암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남쪽 고을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푸른 하늘에서 떠오르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 수많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는 월출산을 두고 매월당 김시습도 이렇게 노래했다. 북의 설악산, 동의 주왕산과 함께 달래골 월출산은 누가 뭐래도  남한의 3대 명산이라 이를 만하다.

  월출산 도갑사로 들어서는 길목에 구림리라는 고풍스러운 마을이 있다. 비둘기가 깃들이는 숲이라는 아름답게 구림리는 온통 숲으로 덮인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영암땅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구림리는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와 백제시대 일본땅에 한자와 유교를 전했다는 왕인 박사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도선은 전설적인 인물이라 그런지 출생 또한 신비의 베일에 가려있다. 도선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냇가에서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집어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는 그 아이를 숲 속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비둘기때가 날아와 날개로 햇볕을 가려주고, 밤이면 새의 깃으로 품어주며, 먹이를 물고 와 아이를 먹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숨을 건진 도선은 문수사라는 절에서 성장하였고, 후일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절터에 도갑사를 짓고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비둘기의 숲 곧 구림리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왕인 박사가 태어났다는 구림리 성기동은 월출산 줄기인 문필봉 아래 위치한다. 지금도 문필봉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을 성천이라 하고, 박사가 즐겨 마셨다는 샘을 성천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왕인 박사 기념관에서 문필봉 쪽으로 오르면 박사가 어릴 적 책을 읽었다는 "책굴"이 그대로 있고, 그 앞에 제자들이 스승의 모습을 바위에 새겼다는 왕인석굴도 남아 있다.

  월출산 국립 공원 관리소가 있는 사자마을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항상 수많은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이들은 대개 바람골의 바람 폭포나 벼랑 위에 흔들리는 구름다리를 타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영암땅에서 정작 가 보아야할 곳은 천황봉 너머 그 반대편인 구림리에 있다. 자랑스런 조상 왕인박사와 도선 국사의 숨결이 밴 유적 말이다. 왕인 박사 기념관은 일본 관광객들의 전유물만은 분명 아니기에 누구나 한번씩은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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