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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글의 어원 - "긋다"에서 그리움까지

  외상을 질 때 흔히 "긋는다" 또는 "달아놓는다"고 말한다. 단골 술집이라면 이런 말도 필요없이 그저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대각선으로 쭉 긋는 시늉만 해 보여도 족하다. 맞돈일 때는 셈을 치른다고 하면서 외상인 경우에는 긋는다거나 달아놓는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긋는다"는 "쓰다" 이전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기록 방식이다. 무언가 새겨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를테면 날짜를 기억하거나 사냥한 짐승의 수를 표시하고자 할 때 대게는 어떤 뾰족한 도구로 벽이나 기둥 같은 곳에 선을 그어 표시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상술을 마셨을 때 낫으로 기둥에 금을 긋거나 새끼 마디에 도토리를 매달아 이를 표적으로 삼곤 했다. 기억하는 일을 달리 말하여 마음에 새겨 둔다고 한다. 명심 또는 각심이라는 한자말이 여기 해당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마음에 선을 긋는 일이다. 비록 눈에 띄지 않지만 마음에 새긴 금만큼 확실한 표적도 없을 듯하다. "제발 이 일만은 마음에 두지 말게"라는 당부는 흔히 듣는 말이지만 마음에 새긴 금을 쉽게 지울수가 없다. 살을 쪼아 먹물을 들이는 애흔 수술이나 돌이나 쇠에 새긴 금석명은 지울수 있으나 마음에 새긴 것만은 지우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금은 긋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 또는 글을 쓰는 일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긋고 그리고 쓰는 일은 백지 상태의 흰 바탕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금, 글 , 그림, 그리움이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가 내 마음의 벽에 금을 그려 놓은 그림자이다. "그립다"는 말은 그 사람의 모습을 자꾸 그리고 싶다거나,  새겨진 그 모습이 새록새록 생각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 상대가 마음에 들면 들수록, 그와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새겨진 금은 많아질 것이고 금의 깊이도 더해만 갈 것이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그립다"는 말 자체가 "그리고 싶다"이기에 이 말은 하면 할수록 더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그리다, 그리워하다, 그립다"는 말의 본뜻을 절묘하게 살린 예를 우리는 김소월의 "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찾는다. 마음 속에 새겨진 무형의 흔적이 그리움이라면, 그리움은 당장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그림자 일 것이다. 대중 가요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이라는 가사도 있지만 그리움이란 역시 대상이 눈 앞에 없는 경우에 쓰일 수 있다. 보고  싶은 님은 당장 그곳에 없어도 그 님의 그림자만은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생명이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은 또한 태양을 등진 어두움의 그늘이다. 그것은 밝고  맑은 분위기가 아니라 우울하고 슬픈 이미지를 나타낸다.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라는 고려가요 "정과정"에서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바람 센 오늘은 너 더욱 그리워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 있나니..." 하는 청마 유치환의 시에서 보듯 그리움은 대체로 울음을 동반하여 얼굴을 내민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그리움이라 한다면 눈으로 불 수 있게 손으로 그려 내는 그림을 글(서,문)이라 할수 있겠다. 글은 새기는 사람에 따라 그의 개성이 배어 있으므로, 이를 일러 글씨라 일컫는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 그리움의 흔적, 곧 글을 쓰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해가고 있음을 본다. 기둥이나 벽에 금을 긋던 원시적 방법은 이내 붓 끝에 먹물을 찍어 긋는 방식으로 바뀐다. 다시 먹물 대신 잉크가, 붓 대신 철핀(펜)이 나와 이를 대신하는 듯 싶더니 곧이어 만년필이나 볼펜이 등장하여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타자기나  컴퓨터가 등장하여 쓰는 일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이처럼 기록 방식은 긋거나 긁는 데서 치거나 두드려 찍는 식으로 변했는데, 이렇게 찍혀 나오는 글씨에서는 무언가 잃은 듯한 허전함을 느낀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자신의 솜씨를 자랑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컴퓨터에서 찍혀 나오는 글씨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든 이의 정성과 손때가 묻어 있는 수제품에서 느껴지는, 그런 맛을 맛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괴발개발 함부로 쓴 악필일망정 글씨에는 쓰는 사람의 개성과 마음의 흔적이 배어 있다. 지문이 묻어 있는 자신의 육향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 날씨로 치면 희끄무레하니 흐린날의 이미지를 가졌지만 그리움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사랑이란 우리 혼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미지의 것을 향하여 갖는 성스러운 그리움"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바람 부는 오늘같은 날에는 어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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