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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제주와 한라산 - 한라산 철쭉은 왜 붉은가


  산이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한라산. 이 두리뭉실한  산(무두산) 정상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천상의 샘이 있다. 이름하여 백록담, 매년 복날이면 하늘 선녀들이 내려와 이 못에서 목욕을 즐긴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으니, 한라산 산신령도 선녀의 목욕 장면만은 외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해마다 이 날이면 산신령은 북쪽 방선문으로 나가 목욕을 끝내고 귀환하는 선녀들을 배웅하곤 했는데, 한번은 너무 서둘러 나간 탓에 그만 선녀들이 옷 입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산신령인들 별 수 있으랴, 아리따운 선녀의 벗은 몸매에 그만 넋이 나갈 수밖에. 알몸을 보인 선녀들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고, 그 보고에 접한 옥황상제는 한라산 신령에게 치한이라는 낙인과 함께 흰사슴으로 변신케 하는 벌을 내린다. 백록은 흰 사슴이란 뜻으로 지금도 해마다 복날이면 사슴 한 마리가 구슬피 울면서 이 못가를 서성거린다고 한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영원한 형벌로 이어질 줄이야. 한라산 윗새오름에 서면 벌써 한라 특유의 숨결이 느껴진다. 사슴으로 전락한 산신령의 회한의 울음인가, 능선 위 갈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애절한 휘파람 소리를 닮아 있다.

  제주는 섬 전체가 한라산 하나로 형성된 만큼 예로부터 산신령의 위세가 대단했다. 사슴으로 전락하기 전 신령의 위세는 녹도나 용두암의 지명전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젠가 이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던 사냥꾼이 활을 잘못 쏘아 신령의 엉덩이를 맞히고 말았다. 그토록 위세당당한 신령이 가만히 있었을 리 만무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신령은 산봉우리를 뽑아 무엄한 사냥꾼을 향해 던졌다. 사냥꾼이 거기에 맞아 즉사했음은 물론이요, 그때 봉우리가 뽑힌 자국이 지금 서귀포 앞  바다에 떠 있는 녹도(흔히 "문섬"이라 부름)가 되었다던가.

  예로부터 제주는 여인의 섬이라 했다.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억세고 질기며 대단히 위대한 존재로 부각된다. 한라산을 달리 불러 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생긴 모습부터 여성적이며 그 품 또한 넓고 포근하기에 이르는 말이다. 슬하에 무려 5백명의 아들을 둔 여인이 한라산 서쪽 능선에 살았다.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간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하루는 큰 가마솥에 해파리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마침 신고 있던 돌나막신이 미끄러지면서 그만 펄펄 끓는 죽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밤늦게 돌아온 아들들은 이런 사정은 모른 채 허겁지겁  죽부터 퍼먹기 시작했다. 배고픈 장정 5백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었으니 오래 갈  리가 없다. 순식간에 솥 밑바닥이  드러났고, 아들들은 거기에서 어머니의 나막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어머니를 찾아보기도 전에 허기부터 채운 자신들의 경솔함을 뉘우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시신을 먹게 된 자식들은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그 자리에서 자결하여 모두 돌로 굳어져 갔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인도의 영취산을 닮았다는 영실의 오백나한상 또는 오백장군상에 얽힌 아주 슬픈 전설이다. 이 부근에서 피는 철쭉이 유독 검붉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 한다.

  5백명의 아들을 거느렸다는 영실기암의 전설보다 한라산 동쪽에 사는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과장이 더 심하다. 어느 천지에 이 할망보다 더 큰 사람이 있을까. 키가 한라산 만하다는 이 할망의 위력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날 할망이 한 발은 성산 일출봉을 디디고 한 발은 식산봉을 디딘 채 쪼그리고  앉아 시원하게 오줌을 쌌더란다. 그런데 그 오줌발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섬 일부가 떨어져 나가 성산포에서 백여 리나 떨어진 우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기를 성산포 부근의 조류가 유독 급한 것도 할망의 오줌발 탓이라고 하니 과장도 이만하면 메가톤급 이라고 할까.

  한라산 철쭉이 유독 붉은 이유는 이 섬에 절부나 효부 전설이 많은 탓이기도 하다. 절세미인 산방덕의 이야기는 제주 여인의 절개를 대변한다. 요즘은 제주도로 여행 온 신부는 이곳 산방굴사 약수샘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정성껏 받아 마신다. 이 물이 산방덕이 낭군을 그리워하며 흘리는 절개의 피눈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 외돌개의 할망바위도 절개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절부에  포함시킬 수 있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죽은 하르방을 기다리다가 선 채로 돌이 된 할망은 시신으로 떠오른 하르방바위를 지금도 절망적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산방덕 여인이나 할망 바위의 망부사는 옛날 이야기라 해도 차귀도가 건너다 보이는 용수리 해안의 절부암은 불과 150년 전에 실존했던 전설이다. 제주섬에 흩어진 절부 전설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까.

  이곳 해안 용수리에 살던 고씨는 대나무를 구하러 차귀도에 갔다가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실종되고 말았다. 당시 열아홉 살이던 고씨의 아내는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절부암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목을 매서 남편의 뒤를 따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가 죽은 바위 밑으로 남편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것인데, 여필종부의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 준 부덕에 바다의 용왕도 감복한 것일까. 금년 봄에도 세찬 바닷 바람속에 한라산의 철쭉은 피어날 것이다. 이 철쭉이 유독 붉은 이유를 흰 사슴의 회한의 눈물에서,  또 제주 여인의 절개에서 찾아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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