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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바느질 용어 - 깁고, 박고, 호고, 공그르고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조침문"을 읽으면서 거기 인용된 잡다한 바느질 용어를 외우느라 고심한 적이 있다. 바늘에 실을 꿰어 그저 깁는다고 하면 될 것을 "깁다"외에도 박고, 호고, 누비고, 공그르고, 시치고, 감치고, 뜨고, 사뜨고, 휘갑치다와 같이 다양한 용어를 동원해 표현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꿰매는 일 한 가지 같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결코 한결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어릴 적 바느질하시는 어머니에게 바늘을 꿰어 드린 경험밖에 없던 나로서는, 이 용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침문"뿐만 아니라 "규중칠우쟁론기"와 같은, 안방 여인들의 글에서 받은 느낌도 대체로 비슷했다. 대수롭지 않은 내용을 두고 공연히 침소봉대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 지극히 섬세한 표현법에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바느질 용어만 하더라도 여성이 아니고서는 지어낼 수 없는 특수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 생활 용어가 고유어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옛 여성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안방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둔 가보를 대하는 기분이랄까. 어줍잖은 문자 지식으로 툭하면 한자말로 대체시키며 선비연하는 남성들에 비해 우리말의 순수성은 오히려 여성들에 의해 보존, 계승되었으니 말이다.

  익히다, 끓이다, 삶다, 달이다, 고다, 찌다, 데우다, 데치다, 졸이다,  굽다, 볶다, 지지다, 튀기다, 저미다, 무치다, 절이다, 버무리다, 덖다 등에서 보듯이 다양한 조리 용어도 그렇다. 음식 만들기도 여성 고유의 일이고 보면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이처럼 순수한 고유어로 남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느질 용어로는 앞서 언급한 동사 이외에도 "땀"이나 "솔기" 또는 마름질, 매듭,  뜨개질, 시접, 박이옷, 누비이불, 가름솔, 곱솔,  쌈솔, 뒤웅솔, 반짇고리 등에 이르기까지 주옥 같은 고유어가 생생히 살아있다. 만약 남성들이 바느질이나 조리일에 관계했다면 이러한 고유어의 순수성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는 말처럼 가장 작은 것으로 비유되는 바느질이지만 바늘이 하는 일은 결코 작지 않다. 바늘이 하는 일, 곧 바느질은 이 헝겊과 저 헝겊, 비약시킨다면 남과 나를 이어 주고 맺어 주고 꿰매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듯이 너와 내가 이어져 우리가 되고, 때로는 부부가 되기도 하며, 아픈 이웃의 상처를 꿰매 주는 일이 바로 바늘의 역할이 아닌가. 옷고름이나 넥타이만 매는 게 아닐 것이다. 언약을 맺고 사랑을 맺고... 이렇게 맺는 일은 인간 관계의 출발점이면서 나무가 열매를 맺는 일처럼 삶의 귀착점이 될 수도 있다. 일의 마지막 단계를 이르는 "마무리"는 "마무르다"에서 온 말이다. 마무르다의 또다른 명사형도 있으나 옷을 입을 때 옷깃을 여미고 끈을 매는 뒷단속을 "매무시"라 하고, 매무시의 나중 모양새를 일러 "매무새"또는 "맵시"라 한다. 형용사로 쓰이는 "맵자하다"라는  말도 여기서 파생되었다. 이는 모양이 꼭 째여 앙증스럽고도 귀엽다는 뜻이니 말 그대로 얼마나 "맵자한"말 인가.

   꿰매는 일을 표현하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 촘촘히 꿰맬 때는 "박음질"이며, 성기게 꿰맬 때는 "홈질"이라 한다. 맞대어 듬성듬성 홀 경우 "시침질"이 되고, 그 사이에 솜을 넣어 죽죽 줄이 지게 박을 경우에는 "누빈다"고 한다. 또한 실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기술적으로 "공그르기"를 할 수 있고, 때로 "사뜨기"나  "휘갑치기"를 하기도 한다. 꿰매는 일도 이처럼 기술적으로 세분하여 표현법을 달리한 것이다. "감치다"도 참으로 감칠맛 나는 표현이다. 두 헝겊의 가장자리를 맞대어 감아 꿰매는 기술을 감친다고 한다. 이 말은 바느질 기술에 사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곧 늘 잊혀지지 않고 가슴속에 감돌고 있음을 뜻하는 추상어가 되기도 하니 우리말의 감칠맛을 이런 표현에서도 발견한다. 바느질 용어의 확산은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총총히 눌러 꿰맨다는 뜻의 "박다"의 경우만 해도 용례가 무궁하다. 사진도 박고, 책도 박아 펴낸다고 한다. 다시는 뒷말이 없게 휘갑을 친다고 하고, 부족한 원고 내용을 좀더 기울 수도 있다. 누비옷이나 누비이불만 누비는 게 아니다. "누비라"라는 차종도 있는 걸 보면 밤거리의 뒷골목에서부터 온 천지사방을 누비고 다닐 수도 있다. 뿐인가, 백결 선생의 옷도 그랬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도승 성철 스님도 누더기나 다름없는 누비옷을 입고 평생을 정진하셨다. 그러나 누군들 이분들의 모습을 추하다고 여길까?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깁는 문화"라 규정한 분도 있다. 그 깁는 일도 단순한 땜질이 아니라 고도의 미학적 경지에 이른 땜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대에 이르러 바느질 문화도 사라지려 한다. 이제 바느질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의 모습도, 다듬이질의 규칙적인 음률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바느질은 사라진다 해도 그 감칠맛 나는 바느질 용어만은 그대로 간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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