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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농경 생활 용어 3 - 사계의 고유 이름

  "철 그른 남동풍"이라는 속담이 있다. 버스 떠난 뒤 손 드는 식으로 때를 놓친 경우를 이름이다.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게 마련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지칭하는 우리말 "철"은 한자어 "절"에서 유래하였다. 절은 계절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철들다(철나다)"에서 보듯 사리를 분별하는 힘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세상일에는 저마다 꼭 필요한 시기가 있음을 알려 준다고나 할까.

  1년 사계를 보는 시각은 저마다 또는 사는 지역 풍토에 따라 다르다. 폴란드 속담에는 봄은 처녀, 여름은 어머니, 가을은 미망인, 겨울은 계모라 부른다고 한다. 어느 영시에는 "4월은 내 애인의 얼굴 위에 있고, 7월은 그녀의 눈 속에 깃들여 있네. 그녀의 가슴 속에 우렁이 있고, 그녀의 마음 속에 냉랭한 12월이 있네."라면서 계절의 감각을 여인의  신체 부위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먼 옛날 이 땅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기에 계절은 농사일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봄을 나타내는 한자 "춘"은 봄 햇살을 받은 뽕나무 새순이 뾰족이 머리는 내민 날의 형상이다. 영어의 "spring"은 돌 틈에서 퐁퐁 솟는 옹달샘이나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가 스프링(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는 뜻이다. 절기로 말한다면 봄비 내리는 우수와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얼음이 깨져 나가는 소리에 놀란다는 경칩이 바로 이 춘이나 spring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말 "봄"의 어원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따뜻한 온기가 다가온다 하여 "불(화)+옴(래)"의 결합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봄의 어원은 이처럼 생동하는 자연 현상을 단순히 "본다(견)"는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 따뜻한 봄 햇살을 받아 초목에 새 생명의 싹이 움트는 경이를 인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봄을 일러 "새봄"이라고 한다. 계절의 첫머리에는 모두 "새"가 붙을 법한데, 새여름이니 새가을, 새겨울이란 말은 들을 수가 없고 오직 봄만을 새봄(신춘)이라 일컫는 것이다. 뽕나무 새순이 돋는 날의 춘, 샘물이 퐁퐁 솟는다는 spring, 또 따뜻함(불)이 다가온다는 "불+옴" 어원설 들은 모두 지엽적인 자연 현상을 묘사한 데 지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말 봄(견)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 현상을 관조하는, 그야말로 인간 중심의 호칭법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 의미상 한 차원 높다고 할까.

  여름은 온갖 초목이 열매를  맺는 계절이다. 여름(실)과 녀름(하)을  고문헌에는 구분하여 적었으나 기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 말로서 의미분화를 일으킨 결과이다. 열매가 열리는 경이는 흘린 땀의 보담인 동시에 대자연의 순리에 따른, 그 결실의 내면을 "열어(개) 보이는"일이기도 하다. 여름은 사람들이 옷을 벗어 몸뚱아리를 열어 보이고 대문이나 창문도 활짝 열어 놓는 개방의 시기다. 이런 의미에서 여름(하)은 열음(개)과 통할 수 있고, 여는 일은 맺는 일과 통할 수 있다. 여름을 영어에서는 "summer"라 한다. 가장 화려한 시기, 곧 한창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오곡백과가 강렬한 햇빛을 받아 왕성한 생명력을 구가하는 여름 한철은 사람으로 치면 혈기방장한 20~30대의 청년기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이처럼 치열하게 생명의 불꽃을 태웠기에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지난 여름은 위대했다"고 읊고 있다.

  가을은 여름 내내 가꾸어 온 땀의 결실을 거둬들이는 시기다. 추수를 고유어로 가실한다 또는 가슬한다고  하는데, 이는 거둬들인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영어의 "autumn" 또는 "harvest"와 마찬가지로 가슬(실)이란 무엇을 "끓을, 벨"이라는 관형어가 그대로 계절을 지칭하는 명사로 굳어진 어형이다. 흔히 가을을 슬픈 계절로 규정한다. 영어의 fall이나 한자말의 조락에서 보듯 이 계절명은 생명의 소진에서 오는 허무감을 강하게 내비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윤회설을 믿은 탓인지 그런 비애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생명이 다하여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서구인들이 눈물지을 때 우리는 결실과 수확의 기쁨을 노래했던 것이다. 가슬이 가을로 굳어진 것처럼 겨슬(겨실)은 겨울로 굳어진다. "겨슬"은 단순히 "있다"의 존대어일 뿐으로 본말은 겨시다(계시다)가 된다. 여기서 "겨"는 존재(거 또는 재)를, "시"는 존칭을 나타낸다. 바깥 사람에 대해 늘 집안에 계시는 여성을 일러 겨집(계집)이라 하지 않는가. 겨울은 집에 계시면서 편안히 휴식하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추수한 곡식을 곳간 속에 갈무리해 놓고 그것을 먹으면서 한겨울의 동면기를  즐기는 것이다. 자연이 쉬는 만큼 인간도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라 할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라 했는데, 두말할 나위 없이 바깥 세상이 폐쇄되면 내부 세계는 넓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따뜻한 정이 흐르기에 우리의 겨울은 결코 춥지 않았다. 계절명에 관한 우리말의 특징을 말한다면 서구어가 자연 중심의 직관적 사고에서 명명된 데 반해 우리 고유어는 인간 중심의 관조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외래어의 범람 속에서도 고유 계절명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우리말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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