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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모어에 대한 인식 1 - 말 속에 담긴 것

  "생각은 무엇으로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또한 "언어가 없다면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을 수도 있다. 이는 언어와 사고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 언어가 분명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간단한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 할때 여러 가지 색깔로 분류된다. 무지개가 바로 그것인데, 무지개 색깔의 수를 물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게 일곱가지라고 답한다. 그런데 프랑스 어린이들은 아홉가지라 하고, 로데지아 어린이들은 세 가지라 답한다. 똑같은 무지개를 두고 수를 달리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색깔을 나타내는 그 나라 말의 어휘수와 관련되는 문제로서 한국에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가지로 배워왔고 불란서에서는 아홉가지로, 로데지아에서는 세 가지로 배워 왔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색깔을 실제로 세어 본 사람은 없을 터이고, 또 셀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경계가 그어진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얼굴에서 뺨과 턱의 분명한 경계를 지을 수도 없으니 뺨과 턱을 하나로 묶어 지칭할 수도 있고, 또 더 세분하여 다른 명칭을 부여할 수도 있다. 한 부모아래 태어난 동기간의 호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동기간을 형,제(아우),자(누나,언니),매(누이,동생)의 넷으로 나눈다.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영어에서는 "brother"와 "sister"의 두 가지로, 말레이시아 어에서는 "sudara"라는 단 한가지 호칭만으로 통용된다.

  한국인은 사고 할때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적인 사고 방식에 따라 행동 유형도 결정된다.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한국인이 영어로 무엇을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할 리 만무하다. 한참 영어공부에 몰두해 있는 학생이 전날 밤에 영어로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어의 언어구조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와 일치할 수밖에 없다. 그 속에는 한국인의 사상이나 정서는 물론 한국의 고유한 냄새까지 배어 있다. 음식으로 말한다면 숭늉이나 막걸리, 김치나 된장에서 풍기는 그런 냄새가 한국어 속에 스며 있다. 이 한국적 냄새는 중국어가 풍기는 자장면 냄새나 일본어가 풍기는 단무지 냄새, 서구어가 풍기는 버트나 치즈 냄새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언어가 풍기는 이런 개성적 색채는 흔히 말하는 언어의 풍토설로 설명되기도 한다. 개별 언어가 가지는 이런 고유한 색채를 좀 더 비근한 예로 설명해 본다. 비교적 콧소리(비음)을 많이 내는 불어에서는 포도주에서 맛 볼수 있는 그런 정감,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할까. 그래서 연인과 사랑을 속삭일 때는 불어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에 반해 남과 싸울 때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장사꾼과 상담을 할 때는 영어를, 친구와 우정을 나눌때는 이태리어를, 신을 찬양할 때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라는 그럴싸한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스페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테지만 전혀 터무니 없지는 않다. 사실 똑같은 구애의 표현이라도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라는 발음을 위해 침을 튀기는 것보다는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우리말도 지역에 따라 말투에서 느끼는 정감은 사뭇 다르다. 방언이라 일컫는, 언어에서의 지방색이 강하게 작용하는 탓이다. 남과 싸울 때는 경상도 말을 쓰는 대신 여자는 나긋나긋한 서울말을 쓰는 편이 이상적일 터이다. 사업이야기는 서울말로, 남을 설득시킬 때는 전라도말로 하고 달 밝은 밤 한가로이 산책할 때는 "차암 달도 밝구만이라우..."하는 식의 충청도 말이 제격일 것이다. 독일의 학자 훔볼트(Humbolt)는 일찍이 언어구조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민족성 사이에 불가분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독일어에는 게르만 민족의 민족성이 배어 있는 것처럼 한국어에는 한민족의 정신과 얼이 녹아 있다. 우리말은 우리의 피부색과 흡사한 흙 속에서, 우리의 운명과도 같은 저 바람 속에서 오랜 세월 숙성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 속에는 분명 한국인의 원형(archetype)이 보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언어를 지키는 일은 민족과 국가를 지키는 일과 직결된다고 하겠다. 우리가 한국어를 갈고 닦아 순화시켜야만 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우리말을 잊지 않았다면 그는 한국인이라 할수 있으나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한국인이라 말하기 어렵다.

  오래 전 일로 기억한다. 공산권 국가와 교류가 없던 시절 체코에 살던 한 한국 여인이 40년만에 고국땅을 밟았다. 기구한 운명으로 체코까지 가게 된 그 여인은 현지에서 체코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 수십년을 살면서 전혀 한국어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의 인터뷰에서 유창한 우리말을 쓰는 그녀를  보고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우리말을 잊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머릿속에서 항상 한국어로 생각하고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홀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어가 가진 위대한 힘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두어주일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공항에서부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영어식 말투를 내뱉는, 그런 얼치기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 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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