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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농경 생활 용어 2 - 바람의 고유 이름

  언젠가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대중가요가 그야말로  바람처럼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대 이름은 바람"이라며 절규하던, 그 노래말 속의 바람은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으나 제목만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어떻든 바람이란 말이 추상어로 쓰일 때는 매우 격조 높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시가 그러하고,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술회한 미당 서정주의 생애가 그렇다. 그리고 일생 일대 단 한 편의 명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남기고 홀연 바람처럼 사라져 간 마가렛  미첼 여사의 생애가 또한 그러하다. 그 본체는 보이지 않으나 소리로만 들리는 이 자연 현상을 두고 우리는 "바람"이라 부른다. 소리로만 들리는 것이기에 바람이라는 말도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일 것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바르" 또는 "부르"라는 소리말에 "암"이라는 명사형 접미사를 붙여 바람이 된 것이다. 바람 그 자체가 움직임을 뜻하기에 "노래를 부르다(창), 소리쳐 부르다(호), 나팔을 불다(취)"에서처럼 부르다, 불다는 동사로 쓰이고 있다. 윤동조는 그의 시 "자화상"에서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고 했는데,  이는 소리처럼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소리 자체가 바람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바람을 공기의 흐름만으로 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의 의미, 이를테면 하늘의 기운이나 우주의 숨결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거느린 세 신들 중에서 우사나 운사보다 풍백을 앞세우는 것도 이러한 우주론적 상징성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구름이나 비는 바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땅 위에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풍월, 풍류라는 말이나 자연지리를 뜻하는 풍토,  풍수라는 말을 보더라도 바람은 그 자체가 자연과의 조화나 본래의 기운을 상징하고 있다.

  바람 이름을 보면 자연 현상에 순응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생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고유어 풍명을 보면 춘하추동 사계절과 동서남북 네 방위에 따라 농어촌, 특히 어촌에서 사용되던 아름다운 우리말이 잘 보존되어 있다. 봄에 부는 동풍을 일러 "샛바람"이라 한다. 샛바람의 "새"는 방위로는 동쪽을 나타내고, 시간으로는 맨 처음, 곧 새로운 시작을 나타낸다. 날이 새다, 설을 쇠다의 동사 "새"를 비롯하여 새벽, 새롭다의 관형사 "새-"와도 어원을 같이한다. 샛바람을 한자어로 춘풍이라함은 계절의 시작이 봄이기 때문이다. 샛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초봄에는 살바람, 소소리바람, 꽃샘바람까지도 곁바람로 따라붙는다. 이른 봄 살 속으로 파고들기에 살바람이요, 그래서 소름이 솟기에 소소리바람이며, 꽃이 피는 데 대한 동장군의 시샘이 고약하기에 꽃샘바람이라 이름하였다. 서풍을 "하늬바람" 또는 "갈바람"이라 한다. 하늘 높은 곳에서 불어오기에 하늬바람(천풍)이며, 주로 가을에 불기에 가수알바람 또는 갈바람(추풍)이라고도 했다.  이 바람은 별로 강하지 않게 솔솔 불기에 실바람이며, 늦더위를 식혀 주기에 선들(산들)바람이며, 얼마 안 있어 서릿바람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어 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는 말에서 마파람은  남풍을 뜻하는데, 우리가 사는 마을과 집들이 모두 남향이기에 이 바람은 앞바람(전풍)과 동일어로 쓰인다. 마파람의  "마"와 이마의 "마"는 동일어로서 이마를 속되게 이를 때 "마빡"이라 하니, 말하면 정면에서 불어와 마빡에 부딪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겨울철 북에서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을 된바람 또는 뒷바람이라 한다. 한민족의 이동경로가 북에서 남으로 이어졌기에 북쪽 오랑캐를 일러 되놈, 된놈(호인)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이 남이요, 귀가 북인 것이다. 가옥 구조에서도 화장실은 뒤에 있으며, 아울러 인체 구조상 대변을 보는 기관은 뒤에 있기에 화장실을 "뒷간"이라 하고, 용변을 보는 일을 "뒤본다" 하지 않는가. 이처럼 새, 하늬, 갈, 마, 뒤가 동서남북을 지칭하는 고유어임을 안다면 뱃사람들이 말하는 샛마가 동남풍이고 높새가 동북풍, 갈마가 서남풍, 높하늬가 서북풍, 된새가  북동풍, 된하늬가 북서풍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풍이 비록 모질고 맵다고는 하나 IMF의 한파에 비길까. 그 강도는 바늘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황소바람이었고 그 위력은 미 대륙을 덮쳤다는 토네이도, 이른바 돌개바람과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 경제는 바람맞은(중풍) 사람처럼  운신이 어려워졌고, 이웃 나라로부터 바람맞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한동안 허파에 바람 든 사림처럼 허둥거린 대가로 이런 매서운 바람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바람"이라는 또 다른 비장의 바람이 있다. 언제까지나 이런 찬바람에 떨고 있을 민족이 아니다. 이보다 더한 바람도 맞아  왔던 우리 민족은 이제 댓바람에 일어서서 얼른 훈훈한 봄바람을 맞아야겠다. 차가운 웃음(고소)을 짓던 이웃들에게 신바람의 가공할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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