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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식기 용어 - 뚝배기보다는 장맛

  사람의 생각을 담아 전하는 그릇을 일러 언어라 한다. 언어라는 그릇은 사고의 내용이나 크기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도 있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거창하게 떠벌릴 수도 있다. 음식을 담는 그릇(식기)도 이와 다를 바 없으니 먹을 거리의 내용에 따라 크기나 모양새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현대인들은 하루 세 번 밥상을 대하면서 거기 놓인 그릇의 고유한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느 민족에게나 오랜 세월 숙성되어 온 식문화의 전통이 있다. 그릇의 이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저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요, 국을 담으면 국그릇, 반찬을 담으면 찬그릇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곤란하다. 철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 그릇도 격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 마시는 경우만 보더라도 맥주는 "컵"에, 와인은 "글라스"에, 소주는 "고뿌"에, 막걸리는 "사발"에 따라서 들이켜야 제격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돈끼리 시골 장터에서 소주 한 고뿌(copo)를  마시거나 막걸리집에서 대포 한잔으로 회포를 풀 수 있다. 이들이 호프집에서 치킨 안주에 생맥주를 마신다고 하면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맥주나 포도주 같은 양주를 고뿌나 사발에 따라 마신다면 전혀 격에 맞지 않는다. 음료수도 국적에 따라,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용어로 불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식사를 위해 식탁에 펼쳐 놓는 식기의 표준 세트를 반상기라 한다. 접시 일색인 서양이 식탁과는 달리 우리 반상기에는 밥그릇, 곧 "바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그릇이 격에 맞게 배열된다. "바리"는 고유어도 한자어도 아닌, 인도에서 건너온 말이다. 불제자의 밥그릇을 뜻하는 이 말은 범어 "바다라"가 발다라라는 한자호 차음되고 다시 이를 줄여 발로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릇을 지칭하는 한자어 발우는 인도의 범어와 중국 한자어의 합작품인 셈이다. 바리는 요즘에 와서는 스님들이나 여성들이 쓰는 그릇에만 국한되어 쓰인다. 바리, 발은 재료나 크기에 따라 그 이름도 세분된다. 놋쇠로 만들면 주발이고 사기로 만들면 사발이며, 크기에 따라 중발이나 종발로 나뉘고, 모양새에 따라 연잎 모양을 하고 있으면 연엽주발이고 속이 우묵하게 생겼으면 우먹(우멍) 주발이다. 우리 전통의 식기가 국그릇을 빼고는 모두 뚜껑을 갖추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바리만은 뚜껑 위에 손잡이용 꼭지까지 달려  있어 그것이 반성의 주인임을 알려 준다. 또한 놋쇠로 만든 주발은 보온을 위해 겨울철에 주로 사용되는 반면 사기로 만든 사발은 더운 여름철에 사용된다. 값싼 사발이 서민용이라는 주장은 이런 실용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치나 깍두기 같은 반찬류를 담는 작은 사발을  "보시기"라 하고, 이와 비슷하지만 아구니가 좀 더 벌어진(바라진) 사발을 말 그대로 "바라기"라 부른다. 보시기도  첫 글자만 따서 "보"로도 쓰이는데 조치(국물을 바특하게 잘 끓은 찌개나 찜)를 담으면 "조칫보"요, 찜을 담으면 "찜보"가 된다.

  바느질이나 조리 용어에서 보듯 이들 생활 용어는 여성들에 의해서 고유어가 잘 보존되어 왔으나 단지 그릇명에서 만은 예외가 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여성의 몫이지만 이 음식을 맛보고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일은 남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시기란 말은 표기될 때 보아로, 바라기도 바라라는 한자로 대신한다. 뿐만 아니라 "쟁개비"란 고유어도 일본어 나베에서 유래한 냄비에 밀리고, 전골틀을 일컫던 "벙거짓골"도 훗날 신선로로 대체되었으며, 음식을 덜어 먹던 "빈그릇"이란 말마저도 한자어 공기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식용어 가운데 우리 식의 한자말이 있다면 "시, 지, 주"로 발음되는 접미어 "자"일 것이다. 이를테면 접자는 "접시"로, 종자는 "종지"로,  분자는 "푼주"로 불리는 예가  그것이다. 접은 넓고 팽팽함을 뜻하는 한자어로서 크기에 따라 대접, 중접, 소접으로 나뉜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을 크기로만 나눈다면 사발(대접), 중발(중접), 종발(소접), 종기 순이 될 것이다. 접시와 함께 뒤늦게 들어온 식기명에 쟁반이란 게 있다. 비록 한자말이긴 해도 소리를 본뜬 감각어여서 호감을 준다. 쟁반의 쟁자는 "쇳소리 쟁그렁 울릴 쟁"이라 하여 자전에 긴 훈을 달고 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쇳소리를 닮은 "쟁"인데, 위세가 당당할 때도 "쟁쟁"이며 누구에게나 "쨍하고 해뜰 날"이 있기에 그래서 "쨍"이다.

  번철이라는 말도 서구어 "프라이팬"에 밀려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동이, 자배기, 버치, 방구리, 쟁첩 등도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들이다. 다만 "뚝배기"만은 아직도 사랑받고 있기에 그나마 위로가 된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는 속담에서처럼 볼품 없는 겉보기에 비해 그 속에 담긴 옛멋이나 인정은 아직도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뚝배기의 참맛은 역시 "알뚝배기"가 으뜸이다. 오가리라고 불리는 이 새끼뚝배기는 거기에 달걀을 쪄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그야말로 인정의 진수를 담은 우리 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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