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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전철역의 이름 - 향토색 짙은 서울 역명

  복잡한 도시에서 출퇴근하면서 새삼 지하철의 고마움을 느낀다. 만약 전철이 건설되지 않았다면 이 엄청난 교통량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쾌적하면서 대량 수송이 가능한 지하철(전철)은 말 그대로 도시 교통의 총아라 할 만하다. 전철을 이용하면서 이따금 못마땅한 점도 눈에 띈다. 전공이 우리말인 만큼 자연히 전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표지판, 이를테면 역이름이나 안내문 또는 안내 방송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적된 바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철역에서 이런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한걸음씩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 생각없이 듣고 지나치던 말이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잘못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도착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이미 완료된 상태를 나타내고, "안전선 밖"이라면 안전하지 못한 위험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안내말은 이렇게 고쳐져야 마땅하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안으로 한걸음씩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최근에 이와 비슷한 문안으로 바뀐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된다.  열차를 바꿔 타는 역을 환승역이라 한다. "바꿀 환"에 "탈 승"을  결합한 한자 조어인데, 아마도 일본의 승환이라는 용어를 모방한 것 같다. 전철역 중에서 종로 3가는 1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역이며, 을지로 3가는 2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역이다. 이처럼 두 선이 서로 교차하는 역을 쉬운 우리말을 써서 그냥 "만남역"이라 하면 어떨까? 고속도로 휴게소를 "만남의 광장"이라 부르고 있으니 만남이라는 그 자체가 매우 의미있는 말이기에 하는 소리다.

  개별적인 역이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역명의 명명에는 그 지역의 고유 지명이 우선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때로 관청명이나 학교명, 또는 주요 건물명이 역명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들이 고유지명에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역명은 또한 그 도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이라면 더욱 바람직하다. 서울은 대학의 도시가 아니라 고궁의 도시며 북한산과 남산, 한강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승을 자랑하는 도시다. 그런데 5백년 도읍지였음을 드러내는 고궁명 또는 남산이나 한강에서 연유한 지명이 전쳘 역명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가? 중앙청역을 경복궁역으로 고친 것은 바람직하다. 보신각이 있는 종로 2가는 종각역이라 명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좀더 욕심을 부린다면 종로 3가역을 종묘역이나 돈화문역으로 명명했더라면 더 좋았을 게다. 아울러 시청역도 덕수궁역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싶다. 전부터 시청을 옮긴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만약 옮긴다면 "구시청역"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보아도 시청이 옮겨 갈 가능성은 있어도 덕수궁이 옮겨 갈 가능성은 전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지역 역명도 이왕이면 우리말 이름이면 좋겠다. 5호선에는 강서로와 곰달래길 교차 지점에 "까치산역"이라는 이름이 있어 산뜻한 인상을 준다. 출근길에 이 역을 지나면 청아한 까치 울음이 들릴 것만 같다. 숨막힐 듯한 도회의 콘크리트 숲에 갇힌 시민들에게 향토색 짙은 역이름만으로 잠시나마 숨통을 트여 줄 수가 있다. 대야미, 상록수, 도봉산, 망원산, 연신내, 무악재, 구파발, 뚝섬, 강변 등은 이름만 들어도 포근하고 정겹지 않은가. 최근 발표된 6,7호선 역명에는 이런 고유지명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다행스럽다. 서강역, 삼각지역, 녹사평역, 한강진역, 봉화산역을 비롯 불광동의 독바위역, 갈현동의 연신내역, 신당동의 버티고개역, 석관동의 돌곶이역, 상도동의 살피재역, 신길동의 보라매역, 상도동의 장승백이역에 이르러서는 지명에 고유어가 파격적으로 많이 들어간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와 같은 고유지명은 불필요하게 대학명이 주류를 이루었던 3,4호선과는 완전히 대조가 된다. 여기서 불필요하다는 건 위치도 잘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으로 대학을 홍보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동대 입구, 한성대, 성신여대, 서울대, 총신대, 성대, 홍대, 이대, 한대, 교대, 건대 등의 대학  역명은 장춘단, 삼선교, 돈암동,  신림동, 이수교, 율전, 서초동, 연희동 등의 고유지명에 이름을 넘겨 주어야 옳다. 대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대학명이 고유지명에 우선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서울 사람치고 삼선교나 돈암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다.  지하철 삼선교 역사에는 세 신선을 그린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세 신선상은 그림으로 남아 있으나 가장 중요한 삼선이란 이름은 엉뚱하게 먼 거리에 있는  대학에 빼앗기고 구차스럽게 "00대 입구(삼선교)"하며 괄호 속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돈암동 역시 마찬가지 신세여서 그 옛날 오랑캐 됫놈들이 넘어왔던 "되너미고개" 돈암은 지금 인근 여자 대학에 이름을 빼앗긴 채 그만 한 많은 고개가 되고 말았다.

  지명은 단순히 지표상의 한 표지만도, 또 하루 아침에  붙여지는 일시적인 이름만도 아니다. 고유지명은 문자 이전의 시애부터 존재해 왔다. 또한 이들은 생물 유기체와도 같은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고유어의 화석과도 같은 존재다. 그것은 또한 어제와 오늘이 함께 숨쉬는 시제 없는 언어로서 그곳에 살아 온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려 있는 만큼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전철역 이름 하나 짓는 데도, 또 그 이름을 불러 주는  데도 조상이 물려 준 정신적 유산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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