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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의 풍토성

    주술적 용어 1 - 끼, 그 가능성의 유전자

  흔히 말하기를 "바람난 여자"보다 "바람기 있는 여자"가 더 매력적이라 한다. 언뜻  보아 두 말이 서로 비슷한 것 같아도 의미상 차이는 크다. 이미 바람이 나서 김이 빠져 버린 사람과 장차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소의 눈빛이나 걸을 때 엉덩이가 요동치는 모습까지도 다를 법하지 않은가. 어떻든 바람과 짝을 이루는 "기"의 유무가 이처럼 크게 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연예가 일각에서 "끼가 있다", "튄다", "뜬다"는 말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이런 말이 무대에 서서 세인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처럼 듣고 싶어하는 말로 변신한 것이다. 끼 있는 사람은 언젠가 튈 수 있기에 주변의 관심을 끌게 되고, 밀어 주고 끌어 주는 이가 없어도 언제든 뜰 수가 있다.

  바람기라는 말에서 보듯 "-기"는 어떤 기질이나 낌새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그런데 이 "-기"가 지금은 된소리화 된 "끼"로서 자립명사로 당당히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끼"를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 잠재된 능력, 또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에너지로 본다면 이는 연예계나 예술계와 같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어 쓸 말은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 또는 한 민족에 이르기까지 이 말은 두루 적용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경제 기적을 이루어 낸 우리 민족을 일러 "끼 있는 민족"이라 불러도 좋을 터이다. "끼"로 발음되는 "기"는 기운을 뜻하는 한자어 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어 기는 딘순한 공기나 호흡만이 아닌,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총체적인 힘, 이른바 원기, 정기, 생기, 기력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좀더 멋진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살리려고 그야말로 기를 쓰면서 노력한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할 수는 없는 법,  기가 꺽이고 기가 질리고 기가 막히고 기가 죽으면 삶의 의미를 잃고 절망하게 된다. 기는 동양철학이나 한의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말이지만 일상어에서는 느낌이나 기운 또는 낌새를 뜻하는 접미어에 불과하다. 이럴 경우 된소리 "끼"로 발음되는데, 옛문서에도 기(긔)를 예사소리가 아닌 "ㅂ긔" 또는 "ㅅ긔"로 적었다. 단순히 된소리화하여 "끼"가  된 것이 아니라 앞 음절의 어떤 모음이 생략되었거나 기라는 한자음 자체가 원래 된소리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기(끼)와 가장 가까운 말이 "신나다", "신들다"고 할 때의 "신" 일 것이다. "신"은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흥이 난 상태를 말하는데, 이 말이 한자어로 옮겨가 신명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고유어 "신"과 한자어 "신"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는 우연의 일치인지 동일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와 "끼"도 유사한 경우로서 "끼" 역시 한자어와는 관계없이 고유어 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안개가 끼다"라고 할 때의 "끼"를 정의하기를 낌새가 있다고 할 때의 "낌"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앞서 "끼"를 정의하기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작은 틈새로만 엿볼 수 있는, 마치 안개가 끼듯 밑으로 퍼져서 서린 기운이 바로 낌새가 아닌가. 그렇다면 "끼"는 분명 우리 몸 속에 잠재한 무한대의 가능성, 바로 세포핵 속에 숨어 있는 유전자를 지칭하는 고유어임이 분명하지 않는가. "기"가 "끼"로 고정되는 과정에서 의미도 다분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숙과 안존을 미덕으로 여겼던 조상들이 "바람기 있는 여자"를 곱게 보아 주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들뜬 마음이나 어떤 행위를 일컫는 "바람"이라는 말 속에 한가지 일에 몰입하고 그것을 향해 끝까지 추구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특히 철저한 전문가가 필요한 이 시대에는 자신의 일에 미치게 몰입하는 태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놀아라"라는 충고를 듣곤 했다. "논다"란 말의 "놀"도 본뜻을 캐 보면 "끼"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놀"은 한 가지 일에 집착하여 온 정신을 기울인다는 뜻을 가졌다. 말하자면 "신"이나 "열" 또는 "흥"이나 "멋"과도 상통하는 말인 것이다. 흔히 윷놀이를 "놀았다"고 하며 무당이 굿을 할 때도 한판 "놀았다"고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명연주자의 표정이나 노래를 열창하는 명가수의 몸짓은 바로 굿을 할 때 신들린 무당의 모습 그대로이다. 평상시의 얼굴은 간 곳이 없이 그야말로 "놀고 있는" 바로 그 자체이다. 때로 눈을 까뒤집기도 하고 때로 일그러진 얼굴로  악기를 연주하는 정경화나 장한나의 표정에서 "끼"나 "놀"의 진정한 의미를 읽는다. 무당은 특별한 사람만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이든 몰입할 수 있는 끼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당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기분이 좋아지면 "신난다"고 하는데,  신이 난다는 말은 바로 무당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이 날 때 그 신이 몸에 내리기만 하면 걸로 무당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처럼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다. 그것만으로 우리가 끼 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그래서 무슨 일이든 집중하기만 하면 신들린 사람처럼 해낼 수 있다. 우리는 춤과 노래로 그 밑바닥에 숨어 있는 신명을 청하고, 신명과 끼를 풀어 냄으로써 삶의 영역과 보람을 확충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끼 있는 사람들이 펼치는 굿판, 이것이 바로 내일의 한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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