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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남원과 춘향 - 여성의 절개, 남성의 절개


  남원은 가는 곳마다 춘향이의 숨결이 배지 않은 곳이 없다. 광한루원이 그렇고 춘향로, 춘향고개, 춘향터널, 오리정, 눈물방죽, 버선밭 등이 모두 그렇다. 심지어 지리산 정령치로 향하는 구룡계곡에는 어느 왕릉에 못잖은 춘향의 묘까지 마련되어  있다. 묘에 잠들어 있어야 할 춘향의 혼백이 지금도 남원 고을을 활보하고 있다고나 할까. 광한루원을 찾을 때는 단순히 옛날 10대  소년소녀의 연애 장소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광한루원에 있는 누각과 연못, 못 속에 솟은 삼신산과 오작교 등은 그보다 더 오래고 깊은 역사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면, 차원 높은 조경문화의 산실로서 되새겨져야 한다.

  달 속에 항아가 사는 전각의 이름이 광한루이며, 년에 오직 한 번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재회하는 상상 속의 가교가 오작교이다. 이 누각은 춘향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저 유명한 황희 정승에 의해 건립되었고, 대학자 정인지에 의해 환상적인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남원골에 이상향을 세워 보고자 했던, 선조들의 오랜 염원이 이런 멋진 누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남원이라는 고을의 본이름도 하늘의 은하수에서 찾아야 한다. 은하수를 고유어로 "미리내"라 하고 용을 "미르" 또는 "미리"라 한다. 남원의 옛이름이 고룡 혹은 용성이고, 이 고을을 둘러싼 산을 지금도 교룡산, 청룡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남원의 본이름은 "미리골, 미르골"로 추정되며, 구체적인 미리내 곧 은하수는 여뀌꽃(요화)이 아름답게 피던 요천이었다. 요천 가에 광한루가 세워지고 그 물 위로 오작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시집 간 춘향은 이젠 오작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요천 곧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별거중인 견우와 직녀는 올해도 틀림없이 칠월칠석에 까막까치가 놓아 준 사랑의 가교에서 눈물의 재회를 이룰 것이다. 광한루원을 거닐며 이제는 항아가 사는 달궁을 떠올리고 견우, 직녀의 미리내 전설을 되새겨 보는 것이 좋겠다. 춘향은 실존 인물로서 추녀였다는 이설이 있다. 이 고장에 전하는 신원설화에 따르면 춘향은 본래 기생으로서 남원 부사의 아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라 한다. 그러나 기생 춘향의 생애는 소설처럼 해피 엔딩은 아니다. 다시는 낭군을 만나지 못한 채 죽어 원귀가 되었고, 이 귀신의 장난으로 남원골은 3년이나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춘향전은 그 원혼을 위로하는 무녀의 살풀이굿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판소리와 춤의 고장 남원은 이런 반전 심리에서 오늘날의 예향으로 거듭난 게 아닌가 한다. 추녀 춘향을 절세가인으로 변신시키고 비운으로 끝난 이들의 연애 사건을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 간 그 기저에는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을 이 고을에 세워 보고자 했던 광한루의 전설과 맥이 통하는 듯하다. 남원 여인의 절개를 말한다면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고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는 고갯마루 산신각의 주인공, 비록 그 이름은 잘 모르지만 절개가 춘향이보다 더 맵고 애국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 말 왜구가 이 고장을 유린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왜구의 우두머리인 아지발도가 이 고개에서 마주친 한 여인을 겁탈하려 했다. 무례하게 젖가슴을 만지며 희롱하려는 놈에게 그녀는 칼로 자신의 가슴을 도려 내면서 저항했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은 자신의 순결만을 지킨 게 아니었다. 사후에 왜구를 토벌하려고 이성계의 군사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여인의 혼령이 나타나 이를 잘 인도함으로써 왜구를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주의 논개에 비견될 수 있는, 이 이름 모르는 여인을 두고 어떤 이는 함양에 사는 과수댁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고갯마루 주막의 주모였다고도 말한다. 지금은 고개 위의 도로 가에 마애여래불이 남아있는데, 부처의 오른손이 자신의 젖가슴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이런 전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편 남원땅에는 남성의 절개를 그린 전설도 있다. 언젠가 양생이라는 총각이 있어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 절방 한켠에서 외롭게 살았단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부처님께 배필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며 하루는 부처님과 저포 놀이로 내기를 걸었다. 늙은 총각의 소원이 이루어지려고 그랬던지 이 윷놀이에서 양생이 부처님을 이기게 되고, 부처님은 약속대로 탑돌이 나왔던 처녀를 택하여 그와 인연을 맺어 준다. 부부가 된 이들은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저는 삼년 전 왜구에게 원통하게 죽은 혼령입니다. 그대와의  전생의 연이 있어 잠시 만났으나 이제 이승을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그대는 너무 아쉬워 마시고 부디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꿈 속에 나타나 양생에게 이런 말을 남긴 아내는 다시는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잠에서 깬 양생은 그 길로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짧았던 사랑의 연을 되씹으며 양생은 약초를 캐면서 산 속에서 홀로 여생을 마친다. 지리산에는 반야를 사랑했던 여신 마야고의 무덤(노고단)과 이도령을 사랑했던 춘향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남자로서 절개를 지킨 양생의 무덤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에서 매월당 김시습이 들려 준 이 희귀한 이야기를 그저 흘려 들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절개가 여성의 전유물은 아닐진대 한번쯤 양생의 무덤도 찾아봄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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