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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경덕왕과 찬기파랑가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나릿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삼국유사'에서)

  기파랑은 누구였을까. 구름에 달이 가듯 아주 스스로운 사람. 하얀 모래와 조약돌이 달빛에 어리는 일오천 냇가에 외로이 서 있는 듯. 추운 서리 내리는 늦가을 들판에 잣나무처럼 그렇게 찬양받아  마땅한 사람. 무엇이 기파랑으로 하여금 그리도 우러르게 했을지. 기파랑은 화랑이라는 풀이가 중심을 이룬다. 단적으로 화랑의 '랑(郞)'자가 붙어 있음으로 해서 그리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록에 오를 만한 사람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화랑에게만 붙여지는 씨끝은 아니다. 처용랑이라든가 문무왕을 도와 당의 군사를 물리친 명랑(明郞),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延烏郞),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은 비형랑, 동명왕 때의 천왕랑(天王郞)의  보기가 모두 화랑이 아닌 게 분명하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바,  병을 고치는 의원이자  충신이며 불도인 기파(耆婆Jiva)가 아닌가 한다. 기파는 어떤 사람이고 경덕왕의 어떤 일로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기파는 인도의 토쿠사시라 나라의 사람으로 성은 아다일러요, 이름은 힝카라는 스승에게 의술을 배웠다. 7년 배움 끝에 마갈타 나라의 왕사성(王舍城)으로 돌아 와서 여러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마침내 왕의 병을 고치는 시의(侍醫)가 되었으며 고치기 어려운 왕의 병을 다스려 이름 높은 의원이 된 이. 특별히 눈에 뜨이는 건 아버지인  왕을 죽인 천하의 불효 아도세왕의  고질병을 고쳐 준 나머지 끝내 아도세왕을 불도에 귀의하도록 한다. 석가세존까지도 기파를 찬양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다.

                경덕왕의 아들 얻기

  당대의 충신이요, 덕망이 높은 충담스님은 저 이름 난 기파의 의술과 덕망을 기림으로써 경덕왕의 성적인 불구를 고쳐 아들을 원하는 염원을 노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기파의 덕을 찬양하면서 부처님께 경덕왕의 소원 성취를 빌었던 것은 아닐까. 경덕왕의 성(性)은 길이가 8치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자식이 없었다. 해서 사량부인(沙梁夫人)을 폐하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삼았다. 이가 뒤에 경수태후가 된다. 어느 날 임금은 표훈대덕(表訓大德)으로 하여금 하늘의 상제(上帝)께 빌어 아들을 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표훈스님이 상제께 알아 보니 딸은 얻을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임금은 다시 청하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로 바꿔 달라고 한다. 하늘 상제는 말하였다. 딸이 아들로 되면 나라가 어렵게 된다고. 임금은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들 얻기를 바랐으니 큰 일이 아닌가. 마침 만월 왕비에게 애기가 들어 서니 임금은 기뻐하였으며 아들을 얻기에 이른다. 한데 이게 웬 일. 왕자가 8살 때에 임금이 죽고 임금 자리에 나아가니 이가 곧 혜공왕이다. 혜공 임금은 어릴 때부터 임금이 될 때까지 여자의 놀이를 했고, 도사(道士)들을 가까이 했다. 급기야 김양상과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하니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아들은 얻지 못하더라도 겨레와 나라가 평안해야 옳은  법. 이를 위해 표훈 스님으로 기파랑을 찬양하여 노래 공양을  하다니. 나라 이름이며 벼슬  이름, 땅 이름도 모두 당나라식으로 만들어 놓더니 그예 나라를 어렵게 만들고 뉘우칠 줄을 몰랐으니 이거야 원 참. 말이 되는가. 멍들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빌었더라면 얼마나 높아 보였을까 말이다.

                잣가지는 성 상징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에서 잣가지의 '잣'은 남성의 성(性)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모양이 툭 솟은 게 마치 남자들의 뿌리와 비슷하다. 짐작하건대 경덕왕의 성은 물건만 쓸데 없이 컸지 힘이 없어 애기를 생산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잣'이란 잣나무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같은 소리로서 '잣'은 고개를 가리킨다(훈몽자회 중8). 모두가 '사이'를 밑뜻으로 한다고 상정된다. 모음이 바뀌면 '잣-젓-좃'이 되는데 고대국어에서는 파찰음소(ㅈ ㅉ ㅊ)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으니 마찰음(ㅅ)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면 '잣 - 삿'이 되니 여기 '삿'은 바로 사이(間 <내훈 1.3>)가 된다. '삿'에서 갈라져  나온 말 가운데에는 싹 새끼 등이 있음을 보면 노래말의 '잣'은 그 자체가 열매이기도 하지만 낱말 겨레와 음소들의 기원으로 보더라도 성 상징이 짙음을 가늠하게 된다. 어쩌면 잣을 많이 들게 하여 임금의 뿌리를 힘 있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 종족 보존이나 생명 보존의 본능은 예나 지금없이  같은 것. 임금이라고 해서 원초적인 본능이 없다면 말이 안된다. 솟대 혹은 솔대나무의 솟(솔)이 태양을 향한 발돋움이요, 믿음이지만 남자의 뿌리를 숭배하는, 그러면서도 청동기(쇠) 문화의 상징이듯이 '잣' 또한 이에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조직의 자리로 보아 두 다리 사이에 솟아 있음은 잣나무의 모양과 뭐 그리 다른가. '사이'란 개념은 스승과 바로  이어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임금이 신과 인간의 사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음은 크게 뉘우쳐 깨달을 일이었다. 표훈 스님 뒤로는 그 이만한 대사가  없었다 함은 일연(一然)의 반도교적인 불제자의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스로가 바로 기면서 말야.

                '아아(阿耶)'의 드높은 경지

  말이란 사물이나 사실 자체가 아님은 잘 아는 일. 그 밑 뿌리는 소리 상징이다. 아무리 더럽거나 나쁜 것일지라도 입말 특히 글로 할 때 그것은 추상화되고 미화되기도 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 중간세계란 결국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특정한 대상 사이를 넘나드는 소리 안의 인식 공간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구름에 가리운 달이 새파란 강물이 출렁이는 강가 모래밭을 걷고 있는 기파랑의  모습을 비춘다. 다시 둘레를 보면 잣가지 높은 나무 숲들이 생명의 바다를 이루고 있음에. 할 말은 다 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노래의 말미암음은 경덕왕의 병을 고쳐 아들 얻게  하는 것이지만 '아아(阿耶)'하는 감탄의 경지에 이르면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 푸른 강물은 이미 충담의 영혼이 어린 불심이 되고 서녁으로 가는 극락의 사자 달님은 영혼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르자면 달의 빛과 강물의 물이 어우러져 새로운 영혼의 움을 틔우는, 거듭나는 삶의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이른다고나 할런지. 거기 무슨 긴 드러냄말이 있을까. 그건 해탈 - 벗어남이며 삶 본래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발돋움이 어린 것이다. 마침내 광기(狂氣) 어린 느낌말 '아아'가 있을 뿐. 흐름으로 보아 무슨 잣나무라든가 화판이라든가 함은 정녕 뱀그림에 다리요 사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있는 걸 없다고 할 수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어우러짐. 성(性)의 같고  다름이 하나 되는 법열(法悅)이요, 암수가 어우러짐의 숨 가쁜 녹아 흐름일 것이다.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는 인도 불교의 경전인 베다경에 나오는 옴(om)과 같은 거룩한 말이 '아아'라는 거다(이재선, 1972. 신라향가의 어법과 수사). '아(阿)'라는 옴은 산스크리트 글자의 처음이기도  하지만 모든 산스크리트 소리는 '아'를 바탕으로 소리마디를 이룬다. 상징적으로 보아 '아'는 영원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바로 떠 올린다. '아'는 우주의 진리이라,  갈고 닦음에 따라 덧없는 삶을 누리는 인간이 무한광대한 절대자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해서 사람을 소우주(小宇宙)라 했을 지 모르겠다(조형호, 1993. 찬기파랑가의 미학적 우주론 참조). 말이 없는 말 -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장 진솔한 표현이 '아아'였을까. 결국 그 절대자의 자리에서 병 잘고치는 기파(耆婆Jiva)를 불러 경덕왕의 병을 고치고 더 나아가서는 병든 나라 사람들의 고침을 기원하였다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절대자의 참된 경지를 말로 할 수 없어 겨우 감탄에 그친 것뿐. 불가에서는 이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이라 한다. 과분(果分)은, 현상세계인 인분(因分)과 짝을 이루는데 절대 진리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 고침을 간절하게 기원하는 경덕왕을 위하여 절대 자비한 부처의 힘을 입은 기파에게 빌었던 일. 이게 사실일진대 현실과 이상은 늘 거리가 있나 보다. 그 거리를 좁힘에 있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니. 충담의 기원을 넘어 달은 지고 강물은 흘렀을 것이며 삶의 생로병사를 벗고자 뭇 사람들은 다시 떠 오르는  해나 밝은 달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니 묻혀진 옛날은 그립고 아쉬워서인가.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땅 겨레들의 스승이요, 어버이임을 길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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