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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여성의 이름 - 언년이, 영자, 정숙, 한송이

  남존여비, 남아선호 사상에 찌든 지난 세월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무명의 존재로 살아왔다. 1910년 최초로 민적부가 만들어질 무렵 약 80퍼센트에 달하는 여성들이 이름이 없었고 또 10퍼센트는 성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모든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초보적인 식별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불린 젖이름(아명)이 있었을 뿐이다. 곱단이, 삼월이, 광주리, 자근년정도로 호칭되던 아명도 시집을 가면 그나마 없어지고 대신 남편이나 자식의 이름에 덧붙여 한평생을 이름 없이 보내게 된다. 여자에게 혼인은 남편의 인권적, 법률적 단위로의 종속을 뜻하기에 독립적 지위의 표현인 이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민적부 작성 당시에 이런 일반적인 아명, 그것도 토박이말로 불리던 이름을 한자로 기록해야 했던 면직원의 고충은 매우 컸을  것이다. 아들인 줄 알았다가 그만 딸이어서 섭섭이, 서운이, 얼굴이 예쁘다 하여 이쁜이, 개처럼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해서 동개 또는 개야등의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면직원들은 그야말로 창작에 가까운 차자표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아명이 어색해질 무렵 여성은 출가와 동시에 택호라는, 이름 아닌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신이 태어난 친정의 지명, 남편이나 자식놈의 이름 밑에 "-댁"  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호칭법을 택호라고 한다. "과천댁, 남산댁, 샘골댁" 따위가 친정 택호요, "돌쇠댁, 삼동이댁, 진동이댁"등이 남편 택호며, "개똥이엄마, 똘똘이엄마, 자야엄마"등이  자식 택호인 것이다. 우리 여성들이 이런 무명의 시대를 지나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한일합방 이후의 일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해 종속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은 오히려 독립을 쟁취했다고나 할까. 한국 여성이 처음 가지게 된 이름은 미에꼬, 다마꼬, 아끼꼬, 히데꼬등 일본식의 "꼬"였다. 우리 발음대로 한다면 영자, 순자, 미자,  숙자, 애자, 춘자등 이른바 "영자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울 모 여고에서 1944년생 학적부를 조사해 봤더니 260명 졸업생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160명이 이런 "영자식"이름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십대 이상의 주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영자야", "순자야" 하고 소리쳐 부르면 반수 이상의 아주머니들이 호응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런 영자의 전성시대는 5공 시절 대통령 부인인 순자의 전성시대를 거쳐 집권 여당인 민자당의 민자의 전성시대에 와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광복과 함께 정숙의 전성시대로 이어진다. 상투적인 작명법에 대한 반발에서인지, 아니면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려는 애국심의 발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 자식이름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대신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한자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의 고유정서를 반영하는 한자가 그런 글자들이다.

  이 이름들은 종래의 무개성한 고정틀을 깼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것이나 여전히 한자의 굴레나 남녀구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최근에는 남녀 구분을 무시한 이름, 이를테면 세돈, 신경, 명환, 인영, 창림, 현호등이 등장하여 남녀평등 사상을 과시하고 있다. 아들딸 구분없이 한 자녀만 낳아 기르려는 현 사회에서 바람직한 경향이라 하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등장하여 새로운 맛을 더한다. 김나라, 이누리, 김바로나, 장한빛, 원빛나, 한아름, 조약돌,  김한솔, 한송이, 한가람, 오사랑,  금잔디, 윤봄시내, 강버들등이 그런 유형이다. 의미도 좋을뿐더러 감각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나라나 누리는 한 뿌리에서 나온 말로 옛 지명이나 인명에서 많이 쓰였다. 이 밖에 하나, 두나, 세나와 같은 수사를 비롯하여  유리, 아리, 나리, 새로미, 새미등도  최근에 매우 선호하는 여성 이름들이다.

  이들 인기있는 여성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서구계 여성명에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서구계 이름의 유형에서 "-아"형과 "-이"형이 전체 여성의 73퍼센트를 차지한다는 보고서가 있다. 이를테면 "주리, 마리, 낸시, 베티"등의  두 음절이 "-이"형이며 "마리아, 수산나, 루치아, 마르타, 새로나"등의 세 음절이름이 "-아"형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름이 비록 서구어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받침이  없어 발음하기도 좋고, 앞서 예든 나라, 누리처럼 의미도 좋기 때문에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박미리, 조아리, 고우리, 정메아리, 맹다리,  최새로미, 우수미, 이새미"등의 "-이"형 이름이나 "윤새라, 김하나, 박두나,  정세나, 이루다, 고루다"등의 "-아"형의  이름도 현대적 감각을 갖춘 좋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각종행사에 동원되는 봉사자들을 "도우미"라고 칭한다. 발음도, 의미도 좋은 적절한 용어라 생각되지만 이 말을 여성 봉사자에게 국한 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 신세대의 이름이라 하여 이처럼 가볍고 산뜻한 어사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나치게 현대적인 세련미만을 찾는다면 이름이 지니는 또 다른 맛을 잃을 우려도 있다. 지난 시절 애용되었던 몽실이, 광주리,  복실이, 동고리, 송이, 어진이, 음전이,  예쁜이, 점박이 등은 다소 촌스러운 데가 있지만 그런대로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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